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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의 문학광장] 가을처럼 익어야 빛이 나는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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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의 문학광장] 가을처럼 익어야 빛이 나는 세월
  • 정명희 시인·수필가 (경기문학인협회장·경기산림문학회장)
  • 승인 2026.11.05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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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 시인·수필가·아동문학가
정명희 시인·수필가·아동문학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가을은 속 깊은 말을 허공에 띄워 놓고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응답을 바람소리로 듣고 있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랜 사랑에 물들어 가면서도 아직까지 귓불이 붉어지게 하는 한 사람의 목소리로 온다. 낡은 레코드판의 한 소절에 걸려 반복되는 구어처럼 들려온다.  
 
 귓전을 맴돌아 가슴을 저미게 하는 그 소리는 가을이 깊어 갈수록 쇳소리가 나지만 잘 들어 보면 어디선가 들어 본 낯설지 않은 소리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허전한 모습 탄력 없는 얼굴의 주인이 연상되고, 어느 산 속 외딴집처럼 들고 나는 날들의 파노라마가 눈가에 펼쳐진다.

 그 집에선 이미 사라진지 오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따스한 밥 짓는 소리와 된장 시래기 국 끓이는 여인의 냄새가 얹혀 있고 조잘거리는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가 묻어 있다. 

 기억의 틈새로 머뭇머뭇 들려주는 말소리가 들렸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내가 없어도 잘 있느냐고 묻는 그 소리는 오래 된 기억의 메모장이다. 손때도 묻어 있고 후회와 실패의 막장이 들어 있다. 죄절의 연속에 가슴 치는 스토리도 있고 시련의 아픔과 삶과 죽음의 인간사가 들어 있다. 어디 그뿐이랴. 말없이 죽어가는 생명체들의 탄식을 통해 윤회의 기원을 약속하기도 한다.  
 그 많은 서사를 한 줄기 바람으로 엮는 가을은 신기의 끝없는 전설이다.

 어느 노시인을 모셔 외줄기 작가인생을 들은 날 저녁은 가을이 주는 최대의 선물이다.
 ‘내 신조는 낙관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이었어요.’
 ‘어떤 고초가 있어도 잘 될 것이다’라며 지금껏 살아 왔지요. 주름진 얼굴에 홍조가 가득하고 두 눈은 반짝인다. 연로한 몸을 곧추 세우고 또박또박 지난날을 상기해 준다. 정확하게 날짜와 시간까지 말하고 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산 역사의 증인으로 꼿꼿하고 명료하게 회고하는 눈빛이 살아 있다. 인생을 대변하는 시인의 시들이 강물로 흐른다. 
  
 바라보는 시인들이 흐뭇하게 그를 바라본다. 역사는 흐르고 동인들은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뒤풀이 환담시간, 소주와 콜라를 섞어 마시며 돌아보는 인생에 거나한 취기를 얹는다.
 화끈거린다며 손을 펴는데 손목에 붉은 홍조가 보인다. 심혈을 기울여 돌아 본 삶에 빠져 잠시 걸음을 놓쳐 상처가 났단다. 
 상처는 인생의 훈장이다. 물파스가 그의 손목위에서 시집 위로 뿌려진다. 시도 다치면 파스를 뿌려야 하나 보다. 시집 위에 파스가 놓이고 시인은 지난날의 상처를 아물린다. 
 따스한 해장국이 시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저녁을 풍성하게 한다. 그의 말은 다시 시가 되어 시집으로 나올 것이다.

 가을은 심연으로 들어가는 응답을 자연 속에서 찾으라 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의 언어로 응답한다. 가을은 바람소리를 엘피판인 양 같은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잘 있느냐고 묻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그 속에 잘 살았다는 격려만 무심으로 있을 뿐이다. 

 귀소본능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파트 입구에 지난 계절에 심었던 꽃들이 허름한 모습으로 반기고 있다. 거름이 부족한 시절에는 몇 뼘으로 꽃을 피웠던 봉선화와 붉은 맨드라미가 질 좋은 거름 덕분에 일미터가 넘게 자라있다. 이제는 가을걷이라며 사라진 꽃대신 그 자리에 조롱조롱 씨앗주머니를 매달고 있다.

 다시 다가 올 다음해를 기다리는 마음이 그 속에도 묻어 있다니. 톡톡 터지는 봉선화 꽃씨 주머니를 손바닥에 담는다. 말없이 뱅그르르 꼬부라지며 작은 꽃씨들이 톡톡 튀어 나온다.
 눈동자 같기도 하고 점 같기도 한 꽃씨들이 손바닥에서 동그르르 굴러다닌다. 생명의 몸짓인가 내년의 기약인가. 단 한 번뿐인 한해살이 인생을 정성들여 담고 있는 꽃씨를 본다. 손바닥에서 굴러 떨어질까 조심조심 움켜쥐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휘르르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하루를 잘 지냈느냐고 묻는 것 같다. 콜택시로 노시인을 보내 드리고, 지역이 다른 몇 분을 배웅했다며 마음의 소리를 전한다. 
 ‘조심해 들어가세요,’ 
 
 탁자위에 모아 둔 분꽃 씨, 골드메리 꽃씨, 접시꽃씨 포함 오늘의 봉선화꽃씨와 맨드라미 꽃씨가 내년에는 아파트 입구를 환히 밝힐 것이다. 올 한해 풀숲처럼 산발한 날들도 새로운 내일을 꿈꿀 것이다. 올해는 몇 번의 설렘을 만났는가 헤아려 본다. 생각지도 않았던 설레임의 순간이 주마등처럼 몰려온다. 물론 딱지가 덜 마른 상처도 함께.

 가을은 마음 추스르는 한 해의 선물 같다. 잘 정리되지 않은 날들도, 기쁘고 즐거웠으며 행복했던 날들도 전부 다 포함해서다. 바람의 응답 중 한 구절을 나만의 해석으로 나열해 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분다. 기억의 바람이 말하고 있다. 잘 들어 보세요. 노시인님의 인생 신조를 요. 그렇게 사시면 되는 게 아닐까요?
 그건 한 사람의 목소리요. 내 인생의 유일한 보루인 내 마음의 소리다. 아니 가을이 말하는 속 깊은 소리인 것이다. 빛나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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