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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읽는 수필] 산책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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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읽는 수필] 산책 여행
  • 곽정미 수필가
  • 승인 2026.10.22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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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 아무 때나 눈을 뜨는 수면의 고난을 겪고 있는 지도 오래. 그때마다 다시 잠을 청하려 애를 썼지만, 오늘 새벽만큼은 문득 머리를 스친 지명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천 의림지. 느닷없는 방향이었다. 그래, 떠나볼까.
  꼼꼼히 짠 계획보다 좀 더 큰 두근두근함을 안고 서둘러 백이십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을 향해 차를 몰았다. 이왕이면 인적이 드문 고요한 시간을 산책하고 싶다는 소망이 덧붙여진 까닭이었다. 차창 밖, 새벽을 밝히기 시작하는 어스름한 여명(黎明). 지평선에 가까운 것부터 연분홍인 듯 주홍색인 듯 붉기도 한 구름이 매혹적으로 펼쳐졌다. 대자연의 이 광경은 무한히 경이롭고 경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넓은 고속도로를 나와 들판과 산을 끼고 달리는 곳에서는 미처 산자락을 오르지 못한 안개가 앞을 가로막으며 자동차의 속력을 진정시켰다. 서두르는 나의 마음도 진정하라는 듯.
  막 도착한 의림지 주변의 산도 안개에 흥건히 풀어져 능선마다 몽롱해져 있었다. 이른 아침, 서둘러 온 마음을 가라앉히고 느슨한 산책자의 발걸음으로 저수지를 향해 걸었다. 부산한 소리와 분주한 움직임이 아직 개입되지 않은 의림지는 고즈넉했다. 자세히 보아야 그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청둥오리들만이 연신 자맥질하느라 소리 없이 바빴다. 가까운 산과 둘레길의 소나무가 물속에 거꾸로 서서도 의연했다.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과 구름도 한 군데 거짓 없이 말갛게 투영되어 있었다. 데칼코마니의 이 풍경은 현실일까, 초현실일까. 가만히 고인 듯 보여도 멀리 눈을 두면 어딘가로 쉼 없이 흐르는 물결. 이천 년 전의 소임(所任)을 잊지 않고 여전히 저 아래 드넓은 평야의 젖줄이 되어 흐르고 있는 의림지. 고요하고 잠잠하며 느린 피아노 소곡을 닮은 이른 아침의 의림지. 
  오래된 옛 기억 속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갔다. 옛날 옛적 삼한시대, 저수지를 축조하던 민생들의 발길을 상상하며 포개듯 따라 걸었다. 가뭄을 극복하려는 백성들의 간절함이 지혜의 물을 모아두는 저수지를 이루게 했다니, 이곳은 그들의 애타는 기도가 모인 곳일지도 모르겠다. 둘레길을 따라 이백여 년의 호흡을 품고 부풀 대로 부푼 채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는 잠잠한 풍경에 고고함을 더했다. 다만, 일정한 방향 없이 꺾이고 휘고 눕기까지 한 소나무들은 어느 때나 불어대는 물가의 매서운 왜바람을 피할 길 없어서였으리라.
  잠시 물가의 작은 의자에 앉아 은빛으로 일렁이는 물결에 시선을 고정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등 뒤를 간지럽혔다. 그 간지럼으로부터 홀연히 존재를 느꼈다. 어느 시원(始原)에서 불어오는 바람일까. 그 바람을 느끼는 나는 또 어디에서 처음 시작된 것일까. 물가에 이르면 왜 나도 모르게 길 잃은 사슴처럼 존재를 탐색하게 되는지, 참 희한하다. 물은 생명의 탄생과 닮은 탓이려나. 
  둘레길의 어느 한 지점에는 우륵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가야금을 탔다는 자리를 기념하는 우륵정이 있었다. 우륵 또한 존재의 시원을 그리워하며 구슬픈 현을 뜯었으리라. 그래, 물가는 한사코 그리움에 젖는 곳이지. 깊은 여운 흐르는 애수의 의림지.
  불현듯, 새벽을 마중하며 다녀온 산책 여행은 푸르고 고요했다. 수천 년의 푸른 물색만큼이나 내몸이 푸르러지고 고요한 풍경 속, 나마저 풍경이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시간이었다. 다사다난한 삶 속, 긴 호흡의 숨돌리기였다.

 


곽정미 수필가
곽정미 수필가

약력

<문학과 비평> 수필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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