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화려한 색으로 시작해 무채색으로 저물어 간다. 진홍빛 단풍과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바스락거리며 떨어지는 잎새들. 제 할 일을 다하고 대지로 돌아가는 자연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어쩐지 숙연하다.
지난 10월 6~7일, 우리는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주천면에 위치한 故 이진철 의용경찰 대장 막내 딸 이정신 아동문학가 고향집을 찾았다. ‘진안군300인 의용경찰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후원한 사료발굴을 위한 제1차 작가 현장답사였다. 정명희 시인, 한미숙 시인, 이정신 아동문학가, 서진호 대표가 함께했다. 운장산 끝자락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는 동시에, 그 산과 들에 묻힌 한국전쟁의 기억을 찾아 나서는 길이었다.
주천면은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운일암반일암으로 알려진 고장이다. 황금빛 벼가 물결치는 들녘은 평온했지만, 우리가 마을 곳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그 풍경과 사뭇 달랐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서는 약 300명의 주민이 의용경찰대를 조직해 향토방위에 나섰다고 한다. 평범한 농민이자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이들은 가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국군과 경찰을 도와 빨치산과 싸웠으며, 교전 중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헌신이 모두 공식적인 기록과 예우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민간인으로 활동했던 이들 가운데 참전 사실과 공적을 입증할 자료가 충분히 확인되지 않아, 아직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후손들에게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동행한 故 이진철 의용경찰대장의 막내딸인 이정신 아동문학가와 서진호 대표는 이들의 참전 사실을 확인하고 명예회복을 돕는 일에 힘쓰고 있다. 주천면 특동대 관련 명부의 발견과 故 이진철 의용경찰대장의 국가유공자 등록은 잊힌 역사를 다시 살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기념사업회는 300인 의용경찰을 기리는 문화예술 추모제와 공적비 건립도 준비하고 있다.
이번 답사에서 특히 마음에 남은 것은 한 참전자의 아들 김 씨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우리는 서너 시간 동안 그의 아버지에 관한 증언을 들었다. 김 씨에 따르면 운일암반일암 인근에는 주민들만 알고 있던 동굴이 있었고, 안쪽에는 12개의 작은 동굴 입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 숨어 있던 빨치산 가운데는 같은 마을 출신도 있었다는 것이다.
경찰 등 토벌대와 동굴 속 빨치산들이 대치하던 때, 김 씨의 아버지가 나섰다고 한다. 그는 목숨을 걸고 작은 동굴 입구까지 다가가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와 자수할 것을 권하며 설득했다. , 위험한 대치 속에서 작은 동굴 입구에 서서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김 씨는 아버지의 설득 끝에 동굴 속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국군과 경찰에 자수했다고 전했다. 한때 이웃이었던 이들이 서로를 적으로 마주해야 했던 시대. 그 사이에서 말을 건넨 한 주민의 용기를 생각하니, 전쟁의 비극과 생명의 무게가 한꺼번에 다가왔다.
김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이후에도 토벌작전에 협력했고, 훗날 군에 입대해 복무했다. 전역 후에는 예비군 중대장으로 활동하며 지역사회에 헌신했다고 한다. 김 씨는 군 입대 이전의 활동까지 확인해 아버지의 공적이 정당하게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의 바람은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나라와 고향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역사에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후손의 기억은 소중한 출발점이며, 관련 명부와 복무 기록, 당시 작전 자료를 함께 살펴 그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뒤따라야 한다.
주민들이 전하는 전쟁의 기억은 참혹했다. 정전협정 뒤에도 산악지대인 주천면에서는 국군과 경찰의토벌작전과 빨치산들과의 무력 충돌이 이어졌다고 한다.
오늘의 주천에는 경운기가 오가고, 들녘에는 가을빛이 내려앉는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먼저 떠난 이들의 희생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참전 사실과 공적을 확인해 합당한 예우로 잇고, 그 이야기를 문학과 예술, 기록과 교육으로 전하는 일이 필요하다. 공적비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다음 세대에게 기억을 맡기는 약속이기도 하다.
돌아오는 길, 운장산 능선 위로 낮은 구름이 흘러갔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소리는 잊힌 이름들을 다시 불러 달라는 속삭임처럼 들렸다. 나뭇잎이 흙으로 돌아가 봄의 생명을 키우듯, 먼저 떠난 이들의 삶도 우리가 기억할 때 오늘의 역사 속에 살아난다.
운장산 끝자락 주천마을. 그곳에서는 흘러가는 구름마저 경건했다. 그 산과 들에 잠든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