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편의 사극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화제의 중심에 있다. ‘단종앓이’를 유행시킨 장 감독은 이 영화를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결합한 팩션(Faction)이라 소개했다.
적극적인 홍보 영향도 있겠지만 분명 수많은 관객이 찾은 특별한 이유가 궁금했다. 관객의 가슴속 깊이 잠재되어 있는 감정의 끈을 잡고 쥐락펴락하는 그 무엇의 존재를 알고 싶었다. 감동의 늪에 빠진 수많은 관객이 헤어나지 못하고 유배지였던 청령포 앞에서 줄을 서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도 언론 매체를 통해 전해졌다.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는 날, 드디어 그 유명한 영화를 보러 집 근처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개봉한 지 3개월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상영관은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17세 어린 왕의 슬픈 역사를 우려낸 영화를 보기 위해 어르신은 물론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젊은 부부들도 많았다.
시작부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웃고 울게 하는 명장면들이 계속되었다. 단종역 배우의 슬픈 눈빛이 시간이 흐르면서 서슬 퍼런 강인한 눈빛으로 점차 변하며 슬픔을 채워가다가 한순간에 성난 파도가 되어 관객을 덮친다. 어린 왕이 비극적으로 목숨을 끊는 장면은 관객들의 미세한 숨소리조차 잦아들게 한다.
‘전하, 거의 다 왔습니다...’라는 배우 엄홍도의 처절한 절규가 영화관을 채우고 관객을 포위한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훌쩍거리는 소리와 탄식이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던 슬픔을 휘젓는다. 단순하게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마음속에 짓누르고 있는 지켜내지 못한 것들이 밀려오는 파도에 부딪혀 산산조각 부서진다. 뜨거운 빗물이 되어 슬픔에 얼어붙은 동강을 따라 함께 흘렀다.
엄홍도의 아들이 길가에 앉아 활 끈을 튕기던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심장에 가시가 박힌 채 어둡고 차가운 강물에 홀로 유령처럼 떠내려가던 어린 왕의 숨통을 끊은 것도 ‘활 끈’이다.
‘끈’의 모양이나 쓰임새는 매우 다양하다. 특히 사람은 누구나 산모의 태반에 연결된 ‘탯줄’이라는 끈을 통해 생명을 시작한다. 그리고 탯줄을 자르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핏줄에 의해 연결된 ‘혈연’이라는 인연을 무엇보다 특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간다. 예전보다는 혈연의 끈끈함이 다소 약해졌고, 가족보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혈연은 중요한 끈이다. 아직도 ‘부모는 뭘 하시는가?’, ‘형제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혈연을 궁금해하고, ‘수저론’으로 태어난 환경을 풍자하기도 한다. ‘금수저’와 ‘흙수저’를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그 기준의 저변에 깔린 의미도 아마 혈연일 것이다.
그런데 혈연이라는 끈조차도 권력(權力)에 대한 인간의 욕망 앞에서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 같다. 역사의 한 장면을 다시 보며 ‘끈’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임금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삼촌은 많은 충신을 살해하는 난(難)을 일으키고, 조카인 어린 왕을 멀고 먼 영월 땅에 귀양을 보냈다. 솔바람 타고 들려오는 애끓는 조카의 울음소리조차도 두려워 결국 목숨마저 거두어 버리고 만다.
혈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의 소중함보다 더 커져 버린 욕망이 낳은 불행한 역사이다. 세습되는 왕의 권력이 넘볼 수 없는 혈연의 끈으로 유지되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음을 만천하가 아는 일이 아닌가. 오로지 눈앞에 놓인 권력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잔인함이 팽팽한 활줄을 당겨버리고 만 것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부(富)에 대한 욕망이 혈연의 끈을 끊기도 한다. 평소 잘 지내던 형제들이 명절에 만나 부모님의 재산을 앞에 두고 칼부림까지 하며 남이 되었다는 안타까운 뉴스를 종종 접한다.
해외영화 ‘라이언 킹’에 등장하는 사자왕 ‘무파사’의 동생 ‘스카’가 떠오른다. 스카는 권력에 대한 무한 탐욕으로 절벽에 매달려 도움을 청하는 무파사의 간절한 눈을 외면한다. 그리고 하이에나 ‘쉔지’ 일당과 손잡고 어린 후계자 ‘심바’의 목숨마저 노린다. 다행히 심바는 성장 후 다시 돌아와 초원의 질서와 평화를 지키는 왕의 자리를 되찾았다. 그런데 이런 잔인함이 동물의 세계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음을 함께 목도(目睹)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끈’은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쓰이며 굵기나 길이, 재질도 다양하다. 물건을 매거나 꿰거나 하는데 쓰는 가늘고 긴 형태로 줄, 실 등이 있다. 물건을 묶기도 하고, 매듭을 지어 다양한 생활수단에 활용하기도 한다.
또 인간관계를 연결하는 혈연, 지연, 학연 등 무형의 끈도 있다. 이것은 혈연의 끈과 사회의 끈으로 나눌 수도 있다.
혈연의 끈은 핏줄로 연결된 가족, 친족관계로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개인의 욕망·행복 추구가 정당화되고 있다고 해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은 여전히 다수의 사람이 동의하는 말이다.
정(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서로 혈연의 개념을 본관이 같은 사람까지 포함한 때도 있다. 명절마다 이른 새벽 샛별 헤아리며 거북이 걸음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고향이나 가족을 찾는 것을 혈연의 소중함이 아닌 무엇으로 설명이 되겠는가.
사회의 끈은 ‘선택’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다양한 형태의 끈이 존재한다. 직장생활이나 동호회, 취미활동, 종교활동 등을 하면서 동료나 친구로 이어지는 끈은 수시로 발생한다.
그뿐만 아니라 고향은 어디인지, 출신 학교까지 물어가며 인연의 끈을 연결하려고 애쓴다. 푸른 꿈을 품은 정치인들이 한 표를 얻기 위해 종이 공약을 호소하는 수단으로서도 무형의 끈이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무형의 끈들은 서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밑거름으로서 연결고리가 된다.
그중에서 ‘결혼’에 대한 인식이 ‘선택’으로 변화하면서 혈연 중심에서 벗어나 사회적 규범·제도와 개인의 선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방향으로 ‘사회의 끈’이 재구성되는 흐름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끈이라는 연결고리가 항상 긍정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회환경과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 안정적이고 윤리적인 사회질서를 저해하는 검은 줄이 되어 꼬리를 물고 연결된다. 공정해야 할 취업, 입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맹목적으로 한쪽을 편드는 사회 이념으로 상대방을 적대시하기도 한다.
느슨하게 혹은 팽팽하게 유지되기도 하고, 서로 뒤엉키기도 하는 무형의 끈을 서로 소통하고 상생하는 관계의 연결고리로 활용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요즘이다.
살아가는 데 있어 끈을 힘껏 당기기도 하고 슬쩍 놓아 주기도 하며 인생의 줄다리기를 한다. 그러다가 거미줄 같은 끈들이 팽팽한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한순간에 가시덤불처럼 뒤엉키기도 한다. 서로 엉킨 끈은 즉시 풀어야 한다. 풀지 못한 매듭은 점점 옭아매어졌다가 어느 순간 ‘툭’하고 끊어져 버릴 수 있다.
한번 끊어진 끈의 새살이 돋을 때까지 채워야 할 가슴앓이로 지새우는 날들이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새로운 끈은 또 다른 세상의 줄다리기를 보여주겠지만, 그 누가 사그라져가는 수많은 운명의 끈 앞에서 환호만 외칠 수 있을까.
약력
2025년 <문학과 비평> 수필 부문 신인상 수상
아주문학 회원, 문학과 비평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