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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의 문학광장] 그리운 것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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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의 문학광장] 그리운 것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서성인다
  • 정명희 시인·수필가 (경기문학인협회장)
  • 승인 2026.09.22 09: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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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원한 바람이 고요를 지키려고 조심조심 까치발을 들고 다가선다. 그런 한낮이었다. 여름 한 복판이라고 하면 더욱 감당이 되지 않을 숨막히는 날들이 연속적으로 끓여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움찔거렸다. 밖은 기댈 곳 하나 없이 끓고 또 끓었다. 너무나 뜨거워서 목덜미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벌겋게 땀띠가 솟아났다. 
 참을 수 있으려나.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산 밑의 아파트는 가끔씩 쉬어가는 바람을 불러 주었다. 백 년 만인가? 아니 지구가 탄생하고 처음이랬다. 유례없이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더니 역류를 했다. 산자락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고 넋을 놓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몰려왔다. 뜬금없이 장마도 아닌데 홍수가 져서 애써 일구었던 논밭과 집들, 그리고 최고의 건축기술을 자랑하는 K댐 건설현장이 두 달도 채 안 남긴 채 터져 버렸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들 수천 명의 죽음과 실종, 뻘들의 끈적거림이 검은 혀를 내두르며 지옥을 방불케 하는 처참함을 보여 주었다. 연일 방송에서는 가족들을 찾아 울부짓는 소리로 정신을 사납게 했다. 
 순식간의 참사, 헬리콥터로 드론으로 신무기를 가지고 진흙밭을 헤매며 한 사람이라도 구제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별 뾰족한 대안은 나오지 못했다. 

 사라진다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 또 있을까? 끝은 분명히 있었으련만 마무리 없는 끝은 허망할 뿐이었다. 

 올 여름의 광기는 입안의 혀를 잡아당기듯 늘어지게 만들었고 연결되는 치통은 밤낮으로 쑤셔대기 시작했다. 약을 먹어도 그때뿐 아무 때고 소스라치게 와삭거리는 통증은 재난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자고 또 잤다. 시간만 나면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걸칠 것조차 생각나지 않아 다행히 혼자인 것이 감사하기까지 했다. 이따금 눈을 떠 허공인 듯 아닌 듯 둘러보다가 지직거리며 꺼지지 않은 유일한 방송 화면의 소식을 주워 담아 의식의 허기를 채웠다. 
 사는 건지 살지 않은 건지. 이것은 아마도 전조증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비몽사몽간에 들이 닥쳤다. 

 산 밑의 아파트에 불이 났다. 오래 된 냉장고에 불이 나서 윗집까지 고스란히 그을리고 말았다. 놀란 사람들이 뛰어나와 아수라장이 되었다. 구경하는 사람들, 십여대의 소방차가 다녀가고 간신히 불은 꺼졌다. 별일 아닌 현실이었다. 새로 사기 아까워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은 윗집까지 화마에 시달린 것이었다. 무엇이든 때를 놓치면 안되는 것이었다. 
 화재 보험이 살렸다. 아파트 주민들끼리 십 시 일 반 모아서 낸 돈으로 화재 두집의 인테리어는 간신히 마감했다. 

 갑자기 에어콘을 켜기가 싫어졌다. 잘못 되면 똑같이 불이 나면 어쩌나 괜한 걱정이 앞섰다. 그래, 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견뎌보자. 몇 년 전부터 시골로 내려간 그의 자린고비정신이 생각났다. 평생 에어콘을 몇 번이나 켰을까. 차를 탈 때도, 숨이 턱턱 막혀도 선풍기조차 켜지 않던 그, 마음속으로 미움이 커져만 갔지만 내색하나 하지 않았다. 싸우자니 그렇고, 작은 일에 초가삼간 불태우는 것처럼 커지는 충돌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지론이었다. 그런데 그가 없으니 똑같이 닮아 있는 나, 신기했다. 미련스러운 건지 고집인건지 작열하는 여름을 선풍기 하나로 끝내 지키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아침출근으로 바쁜 시간에 방송이 나온다. 앞동 아파트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고 했다. 어르신들이 젊은 사람들 보다도 더 빨리 나오셔서 걱정들을 하신다. 
 너도 나도 더위를 피하려고 에어콘, 선풍기, 냉장고를 쉴 새 없이 돌렸던지 변압기가 터져 버린 것이었다. 뜨거운 대낮 한전에서 비상차가 나오고 업체를 불러 하루 종일 고장난 변압기를 교체하느라 동분서주 했다. 관리소장과 안전과장, 경리담당이 쩔쩔매며 흐르는 땀을 씻을 새도 없이 하루를 넘기기 전에 정상으로 돌리는 일에 매진했다. 다행히 저녁 여덟시, 꼬박 12시간 후에 전기가 들어 오니 수돗물도 나오고 가로등도 켜지고 화장실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몇 십 년을 겪어 보지 않았던 것을 제대로 한꺼번에 큰일을 치르니 갑자기 큰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관리소장은 긍정적인 슈퍼맨이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겪으니 무서울 게 없네요. 단 한마디 말로 주민들을 위로했다. 담대함은 주위를 안심하게 해 주는 척후병과 같다.        
  
 정부에서도 이 번 일을 거울삼아 내년에는 민관이 합쳐서 대비를 잘 해야 하리라.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가을이 오나보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볼을 스친다. 아직도 어디선가는 아파서 저 하늘에 별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디선가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것이다. 위의 우주 속에서 우리는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서로 보듬고 껴안으며 살아가다 보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사는 보람도 같이 느끼며 풀 한포기 작은 벌레 하나에도 소중한 생명의 기운을 넣어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하늘이 더욱 높아지면 하얀 구름과 친구하고, 고추잠자리 포물선에 하늘하늘 흩날리는 꽃잎이 되어 어깨를 기대고 노래하는 가을을 맞이하리라.

 

 


정명희 시인·수필가 (경기문학인협회장)
정명희 시인·수필가 (경기문학인협회장)

약력

수원문인협회장/ 화성 서정문학회장/ 환경문학 수석회장 : 역임
수상 : 황조근정훈장
2020 동아방송 최고 문학대상
2026 서울언론문화부문 예술대상(한국아동문학부문 동화부문 대상)
경기문학인 시부문 대상 문학과 비평 대상(타고르 문학상)
매월당 문학상 수상/ 경기예술인상 외

시집 : 사랑 한 잎 그리움 한 잎, 사피니아 연서
동시집 : 사랑의 반딧불, 햇살비
동화집 : 동그라미 요정, 엄마가 사오신 무지개 꿈 외 공저 다수
이론서 : 시문학이론의 실제 (박가을, 윤금아, 정명희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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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용 2026-10-04 21:59:01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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