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세월이 마치 한 편의 꿈처럼 되살아난다. 대학에 입학했다는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들은 해병대에 지원해서 간다는 입영통지서를 턱 내놓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그때처럼 실감 난 적도 없었다. 친정 둘째 동생이 공수부대에 지원해서 떠나던 날이었다. 군 생활을 오래 하신 아버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 아들이야말로 찬란한 해병대 정신을 가슴 깊이 품은 채, 굳센 의지로 해외 출장을 다니고 있다. ‘무적 해병대’ 출신답게 때론 15시간 넘는 긴 비행에도 아무것도 아닌 듯, 맡은 바 임무를 묵묵히 완수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예전 같았으면 가슴이 설레고 초조했겠지만, 지금은 군대 짬밥을 먹은 사람처럼 담담하게 ‘필승!’이라는 응원을 보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은 또 한 번 ‘아들 해병대 잘 다녀왔지?’라며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그 미묘한 실눈은 나를 괴롭히듯 하여 얄밉지만,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늘“남자는 군대를 꼭 다녀와야 한다”라는 말을 강조하던 남편은 6사단에서 병장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나는 수없이 들었다. 한때는 단순한 습관적인 말투나 서툰 애정의 표현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세월 속에 오래 흐르자, 그 속에 담긴 진심과 남자의 무게를 조금씩 가늠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출산을 통해 강해지며 모성을 깊이 품듯, 남자들만의 세계는 혹독한 훈련과 고된 시간을 견뎌내며 단단히 다듬어지는 단체의 연단이었다.
용광로 같은 모성도 세월의 흐름 속에 백로의 날개처럼 서서히 펼쳐본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처럼 굳건한 신념이 아들 가슴과 내 마음에서도 피어난다. 2006년 5월 25일 제1,020기 천자봉 정복의 영예를 안고 붉은 명찰을 달았다. 군사훈련 수료식이 막 끝난 6월 2일, 기념사진 속에 늠름하게 서서 내 품는 아들의 눈빛을 말없이 쳐다본다.
첫 휴가를 나와 버스를 탔을 때 일이다. 아들이 버스에 앉아 있을 때,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가 다가와 아들에게 물었다. “몇 기수인가?”라고 묻자, 아들은 자리에서 용수철 튀듯 일어나 단호하게 “필승”하며 경례했단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를 양보해도 괜찮다며 앉아서 가라고 극구 말리더란다. 해병의 후배임을 알아본 아저씨는 지갑에서 20만 원을 꺼내 아들의 손에 꼭 쥐여 주더란다.
깜짝 놀란 아들은 그 따뜻한 마음을 거절하고 하차할 정류장이 두 코스나 남았는데도 “필승” 외치며 뛰어내렸다고 했다.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처럼 대중교통 안에서도 전우애를 진심으로 실천한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해병 정신을 몸소 가르쳐 주셨다. 붉은 명찰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보내 온 소중한 첫 편지와 두 번째 편지를 오늘 다시 꺼내어 읽어 본다.
<첫 번째 편지>
부모님 귀하
필승! 해병 1,020기 훈병 최00
신병교육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고, 긴장도 많이 되고 걱정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1주 차가 되면서 함께하는 동기들과 친해지고, 몸도 점점 군대 생활에 적응이 되어 이제는 할만해졌습니다. 아빠께서 군 생활하실 때는 저희보다 훨씬 더 힘드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군대는 많이 좋아져서 부대 안에 샤워장과 목욕탕이 잘 갖춰져 있고, 잠잘 때는 온돌방에서 따뜻하게 잠을 잡니다.
감기 예방을 위해 밤낮 아침으로 개인위생과 식사 전 가글용 소금으로 가글까지 합니다. 입소 초반 일주일간은 가 입소 기간이라 사제 옷을 입고 지냈습니다. 그 일주일 동안 개인 적성 검사와 신체검사를 해서 귀향 처리를 합니다. 저는 다행히 귀향 명령을 받지 않고 무사히 통과하였습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훈병 교육이 시작됩니다. 내일부터 입소하여 본격적인 훈병 교육이 6주 동안 시작이 됩니다.
새 군화 전투복 등이 어색하지만, 최씨 가문의 아들답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건강하게 6주 훈련 열심히 받겠습니다.
부디 몸 건강히 계십시오.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덜어도 됩니다.
휴가 나가서 뵙는 날까지 안녕히 계세요.
2006.4.23
<두 번째 편지>
훈병 아닌 이병 최00!!
드디어 나 빨간 명찰 달았어!!
이틀 전에 천자봉 갔다 오고, 이제 모든 훈련 다 끝났어.
아쉬운 게 있다면 사격인데~ 특등사수, 실무가면 꼭 해야지.
그리고 이 편지가 이제 훈련소 마지막 편지야~
큰누나는 싸이 전체 쪽지 편지 보내지 말라고 해줘.
나~ 다음 주면 휴가 나간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인천으로 가서 휴가받는다.
전화할게. 드디어 휴가 나가고, 수료도 받는군. 나 피복도 다 받았어. 슬슬 휴가 나갈 준비해야지. 아마도 지금쯤 엄마, 아빠는 중국에 있겠지?
올 때 아들 먹을 거 좀 사 오라고 해줘~ ㅋㅋㅋ
또 시간이 별로 없군. 아!! 사진 찍은 거 있는데 휴가 때 나가서 보여줄게.
사진이 커서 편지 봉투에 안 들어간다. 모든 훈련 끝났어.
이제 이병 달고 군번줄도 받고 정복도 받았어. 훈련소 생활도 끝나가고 있어. 시간 참! 빠르다. 2년도 금방 가겠지? 휴가 나가서 봐! 군인이 돼서 나갈게.
필승!! 2006년 5월 28일
벌써 20년 전이다. 해병대는 우리 가족의 삶 깊은 곳에 단단한 정신을 심어 주었다. 우리의 가훈은 자신감이 깃들어 있는 “하면 된다.”라는 것이다. 이제는 좀 더 무게가 있고 강렬한 “필승”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97) 문학 21 수필, 08) 문예 비전 시 등단.
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 경기 한국 수필가 협회 감사
사) 화성 문인협회 5대 지부장역임
현) 경기문학인협회 부회장
문학과 비평, 계간 리더스 에세이, 문학 시대 회원
저서 『시간의 끝자락 붙들고, 돌릴수록 커지는 행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