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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과의 소통을 위한 머나먼 여정 정조대왕 능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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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과의 소통을 위한 머나먼 여정 정조대왕 능행차
  • 전경만 기자
  • 승인 2016.10.13 1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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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혁명정신은 지금까지 교훈으로 남아
[경인경제 전경만 기자] 백성과의 소통을 위한 머나먼 여정 정조대왕 능행차


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는 조선의 4대 당파 중 하나인 노론 벽파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 왕위에 올랐으며, 왕좌의 자리에서 수많은 능행을 통해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정조의 정치를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자는 뜻의 홍익사상(弘益思想)과 닮았다 하여 ‘홍익의 정치 ’라고 하며 정조의 호를 홍재(弘齋)라고 한다.

정조가 왕좌에서 정치를 했던 18 세기에 들어선 조선은 인구의 과반수가 세금을 내지 않는 양반층 이었기에 국가 재정은 왕조 유지가 어려울 만큼 힘들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면서 당시 기득권층의 큰 재산 중에 하나였던 사노비의 증가를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병자호란을 겪었던 조선은 극심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많은 양반들은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양민들을 노비화 했다. 양민들이 점차 노비화 되면서 노비들이 도망을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당시 만들어진 기관이 내소사 추심원이다. 추심원에서는 도망친 노비들을 잡아들여 심문했었다. 정조는 즉위하고 나서 중추원 내소사 추심원을 폐쇄하고 도망친 노비들이 양민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었다.

18세기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노비의 숫자만큼이나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평민의 숫자가 줄어 있었다. 정조임금이 초기에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수의 확대와 권력의 분산이 요구된 시절 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득권층인 노론은 지금으로 따지면 재벌기업과도 같은 시전 상인들과 결탁해 중소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난전을 압박, 노론과 시전의 정치적, 경제적 유대관계를 이어 왔다.

이에 정조는 왕권의 확립과 언로를 뚫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과감한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중에 하나가 수원화성의 건설이었다. 정조는 수원화성 건설을 위해 효라는 명분을 만들었다. 우선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의 화성 윤건릉으로 옮기고, 수원에 미니어처급 한양을 만들었다. 수원성 축조(수원화성)에는 조선시대 성곽기술의 모든 최첨단 기술(거중기 -정약용)을 적용해 성을 쌓았다.

그리고 기득권인 노론 벽파 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한데 모아 재분배하는 방법을 모색했으며, 저수지 농법 이라는 새로운 농사기술을 보급해 수원에 충만제(저수지)를 건설했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기본경제를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상당한 저항을 받았다. 정조는 양반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민층의 확산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양민들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도록 새로운 농법을 고안해 보급했다. 그것이 근대농업의 시조가 되는 저수지 농법이며 저수지 농법은 오늘날 모든 농사의 기본적인 형태가 됐다.

정조는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일부 노론 계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행을 다니며 격쟁을 즐겨 들었다. 정조가 가장 즐겼던 원행은 수원화성능행차이다.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화성에 능행차 가기를 즐겨했으며 새로이 만들어진 수원화성에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람으로서의 효를 다했다. 이 과정에서 정조는 백성들의 말을 즐겨 듣기 위해 격쟁을 실시하도록 했다.

'격쟁'이란 왕이 멀리 행차(원행) 하는 중간에 백성들이 쟁을 울리며 왕 앞에 엎드려 당시 양반들의 부도덕함과 그로인한 자신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말 할 수 있도록 허락한 독특한 제도다.

이에 대해, 노론과 일부 상류계층은 왕에게 백성이 직간(관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대면 상소)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이를 못 하도록 수십 번 상소를 올렸으며, 격쟁을 하는 자에게 벌을 내려달라 주청 했다. 그러나 정조는 끝내 양반들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과서에도 실리는 정조와 영조의 업적으로는 탕평책이 나온다. 탕평책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질서와 사상을 담기위해 궁궐내에 규장각을 설치하며 시작된다. 규장각은 정조가 설립한 왕립학문 연구기관으로, 기존의 유학을 바탕으로 새로이 들어오는 모든 학문을 수용했다. 정조시대에 천주교가 허락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당파와 당적에 관계없이 수많은 인재가 배출 된다.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모두 이곳을 거쳐 조선후기 실학을 꽃피우는 주역이 되며, 조선은 부흥한다.

그러나 정조는 선대 왕 이었던 영조처럼 후계자를 제대로 육성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여기에 당시 집권층이었던 노론은 자신들의 자금줄이 점점 무너지고 새로운 계층이 만들어지는 것을 한없이 두려워했다. 노론은 저항했다. 저항은 정조에 대한 암살 시도로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독살 시도도 여러 번 있었다.

정조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후계자에게 까지 이어졌다. 양반출신이 아닌 빈의 몸에서 탄생한 문효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너무 염려한 나머지 독살시키기에 이른다. 결국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가 자신을 반듯하게 성장시켜 군주의 자리에 올려놨으나 본인은 아들인 ‘문효세자’를 지키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시간조차 정조에게 아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하지 못했다. 두려움에 가득차 있던 노론은 정조의 탕평책으로 사화를 피해 가려는 정조의 의지 속에 숨어서 힘을 축적, 집약하고 있다가 정조 사후 바로 재집권에 성공한다. 정조의 개혁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이 났지만 능행으로 이어진 소통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졌다.

지난 9일 서울 경복궁에서 출발한 정조의 능행차재현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당시로서는 첨단공법이라고 할 수 있는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고 일주일 동안 행군을 강행하면서 수원에 이르기까지 정조는 백성의 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정조대왕 능행차는 그래서 여론과 소통하는 길이며 백성을 돌보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정조는 수원에 후에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수원화성을 건설하면서 부역 대신 조선왕조의 사비였던 내탕금을 사용해 백성들에게 급여를 준 임금이다. 백성에게 일을 시키면서 세금대신 노역비를 지불한 조선최초의 임금인 것이다. 정조가 걸었던 길을 따라 서울에서 수원까지를 재현한 수원시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10월 이다. 마침 2016년은 수원화성 방문의 해다. 정조의 길을 따라 민주와 소통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능행차길의 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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