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단풍으로 눈부시다. 단풍으로 싱그럽던 누리는 중후한 여인의 미소로 다가온다. 자기만의 고운 색깔로 한껏 멋을 부린 단풍이 어느새 빛바랜 낙엽이 되어 스산한 바람에 머물 곳을 찾는다.
바람은 숲을 좋아하는가보다. 찬바람이 코끝을 스치며 휑하니 숲속으로 긴 꼬리를 감춘다. 가을은 바람처럼 소리 없이 떠나가는 계절인가. 세월을 덧없다 하더니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가 하나, 둘 밤하늘에 별이 되어 황망히 떠나간다. 나도 눈을 부릅뜨고 달려드는 황혼열차의 플랫폼에 발을 들인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누군가 삶을 선물이라고 하였던가. 삶을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자신도 모르는 혜택이 한 몫을 한다. 햇볕과 공기는 누가 주었으며, 물과 불은 어디에서 났는가. 마음의 정거장에 머물며 숨을 한 호흡 크게 마셔보자. 신선한 공기가 폐 속 깊숙이 들어오는 상쾌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우주 안에서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기적과 같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생각도 모두 다르다. 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일란성쌍둥이도 서로 다르지 않은가. 하물며 하찮은 곤충도 같은 것은 없다. 각기 고유의 몫도 다르다. 그래서 더욱 소중한 게 아니겠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을 허투루 살아서야 되겠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고난 자기 몫이 있다. 자신의 뿌리인 조상을 공경해야 함은 기본 도리이다. 부모는 자신의 피붙이인 자식을 보듬어 보살펴야 하고 자식은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를 공경해야 함은 당연한 예의범절이고 도리이다.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 무서운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새들도 새끼를 낳으면 보호하는데 하물며 엄마라는 사람의 자식 해코지가 소름이 돋을 만큼 섬뜩하다, 자기가 낳아서 며칠 전까지 젖을 빨리던 핏덩이를 쓰레기장에 내다버린 엄마가 있다. 연로하신 부모를 손발 묶어놓는 요양원에 맡겨놓고 찾아보지 않는 자식도 허다하다고 한다.
자연을 보라. 자연은 자연다운데 사람은 과연 사람다운가? 숲은 사람도 하지 못하는 넉넉함으로 서로를 보듬는다. 나무는 덩굴이 타고 오르게 등을 내어준다. 이끼가 잔뜩 끼었는데도 근지럽지도 않은지 천연덕스럽게 서있는 나무도 있다. 서로 보듬는 마음은 만기일에 꺼내 쓸 수 있는 적금이 아니라 지금 바로 쓸 수 있는 주머니 속의 현금과 같은 것이다. 남을 생각하는 말과 행동으로 일상의 자리에서 향기가 나는 꿀 잼의 삶을 산다면 천국이 따로 없다. 하지만 자기만을 위한 삶으로 앉은 자리에 곰팡이가 슬고 남의 시선이 따가우면 지옥인 것이다. 이웃들과의 관계를 도탑게 하여 분홍빛 웃음꽃을 피울 수 있다면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지 않겠나.
세상에는 영원한 존재가 없을성싶다. 꽃들이 향기를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더한다. 봄이면 진한 향기로 세상을 분칠하던 아카시아 꽃, 밤나무 꽃의 향기가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인지 꿀벌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한다. 벌이 줄어드니 꽃이 만개했던 벚나무에 버찌가 보이질 않는다. 울안에 매실도 예전 같지 않다.
영원히 푸른 나무도 없다. 먼저 나온 잎은 떡잎이 되어 새로 나오는 순을 성하게 하고 밑가지는 삭정이가 되어 윗가지를 자라게 한다. 자기 몫을 다하고는 고사목이이 되어 고고한 모습으로 푸른 숲을 지킨다.
세상의 이치는 비슷하다. 사람도 영원히 살 것처럼 흰소리를 치지만 허풍인 경우가 허다하다. 생명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유한성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진지하게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유한성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일찍이 꾀를 내어 내세관을 궁리하였으리라. 현세의 삶이 끝나면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관념이 내세관이 아닌가.
내세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삶은 많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내세를 인정하지 않으면 삶의 끝자락인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만, 내세를 인정하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현세를 사는 우리는 내세를 걱정하기에 앞서 버킷리스트를 찾아나서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내세가 보장되지 않을까?
숲은 산을 이루고 산은 짐승이나 새들의 둥지가 된다. 많은 짐승이 뛰놀고 새들이 지저귄다. 짐승은 몸뚱이가 무거워지면 행동이 굼뜨게 되고 새는 멀리 날지 못한다. 사람도 끌어안기만 즐기고 내어주기를 게을리 하면 몸이 무거워져 뒤뚱거리게 된다. 그러면 체중을 줄여야 한다. 몸무게뿐만 아니라 욕심의 올가미를 풀어 영혼을 산들바람처럼 자유롭게 해야 한다. 마음에 가지치기를 하고 미움의 돌덩이를 치워 영혼을 맑고 가볍게 해야겠지. 끊긴 곳은 잇고 막힌 곳은 뚫어 광야로 나가보자.
모든 일은 갈무리가 중요하다. 삶은 더욱 그럴 것 같다. 죽음과 맞서지 말고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게 좋을 성싶다.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죽음은 나무 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감과 같으리라. 나무 잎이 떨어져 거름이 되듯 사람도 죽어서 세상에 거름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지 않겠나.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뒷모습을 아름답게 해야겠지.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도 작은 물구덩이를 피해간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물이 아직 반이나 남았네.’와 ‘벌써 반이나 먹었네.’의 셈법과 같이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숙고를 깊게 한다. 살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앞두고 삶을 반추해야겠지.
삶과 죽음은 나누려 해도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듯싶다. 시신을 거두는 염장이의 말을 빌리면 죽은 후 시체에는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서려있다고 한다. 힘들게 살다 죽은 사람은 죽은 후의 모습도 편치 않고, 곱게 살다 죽은 사람은 곤히 잠든 아기의 모습과 같다고 한다.
내 인생의 계절은 지금 단풍이 익어가는 가을일까. 가지 끝에 매달려 파르르 떠는 마지막 잎 새의 겨울일까. 욕심 같아서는 노을빛을 닮아 말갛게 익어가는 홍시 같은 가을이고 싶다.

약력
『아주문학』 회원, 『문학과 비평』 작가회 회원
『경기 문학인』 협회 회원
『문학과 비평』 시 부문 신인상 수상
『문학과 비평』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문학과 비평』 작가상 수상
『아주문학상』 수상
『경기문학인』작품상 수상
시집 「임의 숨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