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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동칼럼] 추사서예박물관, 후지츠카와 난학(蘭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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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동칼럼] 추사서예박물관, 후지츠카와 난학(蘭學)의 세계
  • 김훈동 시인 · 전 경기적십자사 회장
  • 승인 2023.08.10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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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동 시인·전 경기적십자사 회장
김훈동 시인·전 경기적십자사 회장

과천은 추사 김정희가 사망하기 전 4년 동안 머물던 곳이다.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한성판윤을 지낼 때 지은 별장인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 장소에 추사가 꽃피웠던 학문과 예술의 정수를 널리 알리기 위해 과천시가 박물관을 세웠다. 
올해 추사서예박물관이 개관10주년을 맞았다. 개관기념으로 일본 실학을 이어받은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 박사의 학문적 연원인 ‘난학 특별전’을 펼쳤다. 당시 일본은 교류가 잦았던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고 표기했다. 난학은 에도시대 주로 네덜란드를 통해 전래한 서양의 의학과 과학 지식을 연구한 학문이다. 후지츠카 가문은 난학의 세례를 통하여 신도학(神道學), 의학, 금석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전통사회에서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동아시아 삼국은 청나라의 고증학, 조선의 실학, 일본의 난학이 일어나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 갔다. 그간 추사박물관은 후지츠카 기증유물로 2006년 <추사글씨 귀향전>, 2008년 <후지츠카의 추사연구자료전>을 개최했다. 주로 추사 김정희에 관련 자료전이었다. 이번에는 후지츠카 가문자료를 중심으로 난학과 후지츠카 가문의 변화, 가문의 중요유물, 후지츠카 치카시의 교유 인물의 글씨와 편지, 인장, 그리고 그의 학문을 살펴보는 특별전이었다. 후지츠카  치카시가 ‘어떻게 추사를 연구하게 되었을까’하는 궁금증을 알 수 있는 전시였다.
박물관에는 후지츠카 부자의 학문적 성취와 추사 관련 유물의 기증을 기념하는 고정 전시공간도 마련되어있다. 후지츠카 치카시는 일본의 유명한 경학자이자 추사연구가였다. 그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는 아버지 사후(死後)에 선친이 수집한 추사 자료를 과천시에 기증했다. 후지츠카 치카시의 논어연구, 추사를 중심으로 한 청조문화 동전의 연구, 사진으로 남은 추사 글씨 등을 살필 수 있다.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가 집안에 간직해온 방대한 추사유물을 기증하면서 “추사연구를 계속 해달라”는 그와의 약속을 과천시는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과 ‘후지츠카와 난학’ 전시와 함께 도록 발간도 그 일환이다. 특별전 기간에 일본대사관에서 한·일 우호친선교류 온라인 세미나도 열렸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후지츠카 치카시’, ‘김정희의 세한도와 국립중앙박물관’, ‘과천시 추사박물관과 후지츠카 컬렉션’ 등의 주제발표와 토론이 진행되어 추사서예박물관 개관10주년의 의미를 더했다. 후지츠카 치카시 박사는 동경제국대학교 문과대학 중국철학과를 졸업,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하면서 <조선에서의 청 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일본·조선·청의 문화교류』, 『추사 김정희 또 다른 얼굴』, 『추사 김정희 연구』 등이 있다.
후지츠카 치카시가 유명한 것은 우리나라 국보 제180호 세한도를 소장했던 인물이기에 그렇다.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준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화다.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세한도는 그의 아들 김준학이 물려받았다. 그 후 민영휘, 민규식 부자를 거쳐 추사연구가 후지츠카 치카시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는 추사 작품 컬렉터였다. 세한도를 포함해 자신이 수집했던 추사의 서화와 관련 자료 수천 점을 갖고 경성제국대 교수를 마치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경성에 있던 서예가이자 고서 컬렉터 소전 손재형이 들었다. 그는 전남 진도의 부잣집 출신이었다. 곧바로 거금을 마련해 후지츠카 치카시가 사는 도쿄에 갔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도쿄는 밤낮없이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손재형은 물어물어 후지츠카 치카시의 집을 찾았다. 근처 여관에 집을 풀고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츠카 치카시를 매일 찾아가 “세한도는 조선 땅에 있어야 합니다. 저에게 작품을 넘겨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렇게 한 달여 후지츠카 치카시의 마음이 움직였다. 아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세한도를 이 젊은이에게 돌려주라”고 했다. 아버지의 말을 아들이 지킨다는 보장이 없었다. 손재형은 다음 날부터 또다시 찾아갔다. 마침내 세한도를 내주었다. 그때 세한도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세한도는 한 줌 재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이듬해 서화 작품들을 보관한 후지츠카 치카시 연구실이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기에 그렇다. 수집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특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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