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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의 문학광장] 글에도 생각의 씨앗이 있어 싹을 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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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의 문학광장] 글에도 생각의 씨앗이 있어 싹을 티운다
  • 정명희 한국문인협회 수원지부장
  • 승인 2020.11.30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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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희 한국문인협회 수원지부장

「몇 년 전 <세상의 중심에서 이탈한 모든 별똥별들에게 바친다!>며 시인 안도현은 시의 중심에서 일탈하여 시와 산문 사이에서 방황하고 긴장한 흔적들을 모아 《잡문》이라는 문패를 내걸었다. “현실을 타개해 나갈 능력이 없는 시, 나 하나도 감동시키지 못하는 시를 오래 붙들고 앉아 있는 것이 괴롭다”며 절필을 선언한 시인 안도현! 시와 산문의 마음 사이에서 방황하고 긴장한 흔적들을 모아 《안도현 잡문》이 나왔다.」 그의 잡문에 대한 책 소개의 한 부분이다.

며칠 전 가까운 지인인 여류시인의 시속에서 <무라카와 하루키>에 대한 책을 소개 하는 것을 한 편의 시에 담아 시어로 표현한 것을 보았다. 감상은 감상하는 자만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감하기를 원하고 비평의 울타리를 치고 싶어 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모든 것을 시의 본향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시를 감상할 때도 시를 시어로 보지 않고 시어를 감성으로 받아들여 한 폭의 시화로 보려는 습관이 있다. 여류시인의 시를 읽으며 몇 사람은 시 속에서 <무라카와 하루키>를 왜 시인이라고 보았느냐, 그가 시인이냐를 따져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라카와 하루키>는 안도현 시인과 달리 소설가고 시인이라는 이름은 그 어느 곳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는 시를 한 편도 쓰지 않았을까?

다시 말하면 안도현 시인의 <잡문>과 일본의 무라카와 하루키의 <잡문> 중 시 같은 것은 없었을까 하느냐는 점이다. 나는 그 대목에서 부정을 하고 싶은 것이다. 소설과 수필 또는 시는 누가 구별해 놓았는가. 요즈음의 현대시는 수필 같기도 하고 짧은 꽁트 같기도 하고 더 나아가 단편 같은 시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시라면 시고 소설이라면 소설인 것이다.

물론 안도현시인은 잡문이라 하지만 내용이 시적이며 시 같은 잡문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저 시인이라는 명패를 달았고 사람들은 그가 잡문을 쓰던 수필을 쓰던 상관 않고 시인이니 시처럼 읽으려 한다는 것이다.

<무라카와 하루키>는 소설가다. 그의 문장은 생활을 아주 잘게 쪼개서 대조적이며 역발상적으로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감정의 골을 스스럼 없이 건드리고 있다. 나에게는 그의 소설이 수필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며 더 나가면 시적인 마음으로 그의 소설을 읽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을 때면 진도가 안 나간다. 문장에 감탄하고 그의 생각에 감탄하고 그의 글을 동경하며 질투까지 한다. 묵어버린 나의 두뇌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습관적으로 시인인 양 외치는 나는 그의 명문장에 시를 생각하고 시적 감성을 들이대는 것이다.

요즘 나는 시를 쓰지 않아도 좋은 유혹과 복어처럼 불러지는 스트레스의 배를 탐닉하며 안도현 시인의 고뇌에 동참하고 있다. 어쩌면 생각이란 것은 아예 하지 않고 무엇인가 몰려오는 마지막 공포의 장면처럼 세상을 살벌하게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 덜 성숙한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 때문이다. 안도현 시인이 말했듯이 ‘시를 쓰지 않아도, 시를 오래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치열하게 ‘시를 써서 나를 부각시킬 것인가’ 머리가 지끈지끈 쑤시는 오늘을 아프도록 직시하며 혼돈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대의 양심이다. 그 양심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는 것은 시인에게는 고통이다. “저녁은 안으로 나를 접어 넣어야 하는 시간이다. 나무들이 그렇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섬세한 발견이다. “기를 쓰고 시를 읽었는데, 지금은 시나 읽으니 참 좋다. 기를 쓰고 시를 썼는데, 시를 쓰지 않으니까 더 좋다.” 시에서 벗어나 세상의 소리를 더 뜨거운 마음으로 읽어낸 글들은 단 한 줄만으로도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한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가장 담담한 어조로 말을 건넨다. “오늘은 천천히 걷다가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양말을 벗어봐야지. 내 맨발이 햇볕을 빨아먹다가 마구 키득키득거리겠지. 내가 바라는 나라가 그런 나라인데.” 작은 것들을 살피고, 그 작고 소소한 것들에 감사하며 깊은 삶의 의미를 깨닫는 안도현 시인의 목소리에 어느새 무조건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나를 본다. 소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있지만, 소중하지 않은 것들은 없다. 그 작은 것들이 모여 큰 세상을 이루듯이, 안도현 시인의 이 소소한 글들을 읽다 보니 큰 울림으로 전해진다.

중국의 루쉰은 잡문이라는 형식을 무기 삼아 당대의 현실을 타개해보려고 했다. 잡스러운 문장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겠다는 전략이었다. 안도현 저자는 스스로 그러한 호기 넘치는 의도는 없다고 한다. 그저 작가의 머리를 스쳐간 잡념들과 새들을 보고, 산을 보고, 나무들을 보며 하릴 없이 중얼거렸던 그 말들을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너는 꽃 피고 새가 울어서 봄이라지만 나는 이유 없이 아프고 가려워서 봄이다”라는 목소리에는 아픔을 견지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들어앉아 있다.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가다 보면 지루한 일상을 깨뜨리는 문장에서 위안을 얻고, 진정한 잡문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 잡문은 시인가 아닌가. <무라카와하루키>의 소설이 내 마음에 시처럼 왔다 간 날, 안도현 시인의 <잡문>이 시처럼 다녀 간 날 나는 한 편의 시를 읽으며 한편의 시를 아주 편안하게 써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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