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찬민 수원시의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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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찬민 수원시의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의원
  • 대담: 김인종 편집위원장 / 글, 사진: 김동초 대기자
  • 승인 2020.10.2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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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찬민 수원시의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의원이 경인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다.
최찬민 수원시의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의원이 경인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다.

몸매가 다부지다. 하얀 피부에 떡 벌어진 가슴과 잘 발달된 상체가 마치 현역 헬스트레이너 같다. 한 도시의 정치인이라기보다 스포츠 강사 같은 느낌이 강했다.

아무튼 최찬민 수원시의회 더불어민주당대표의원은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순박함과 솔직함은 마치 섬 소년 같은 뉘앙스마저 풍기고 있었다.

 

최 의원은 73년 전남신안군 자은면에서 농사를 짓던 35남의 다복한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났다고 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신안의 앞바다는 보물선이 가라앉은 장소로 유명하다. 1323년 많은 보물을 실고 일본으로 가던 중국 원()나라 무역선이 침몰을 한곳이다. 그리고 652년 지난 1975, 물고기를 잡던 우리나라 어부에 의해 발견되어 장장 10년간 도자기 24천여 점, 동전 8만개(28) 등 수많은 보물을 인양하기도 했다. 가치로는 1조원이 넘었고 신안유물전이 따로 열리고 있을 정도다.

이 발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불법인양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야기하며 윤태호작가의 유명 웹툰 파인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최 의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안군 자은면이 바닷가 마을로 어업이 주된 곳은 아니라고 했다.

 

신안군 자은면은 전체 주민의 95%가 농사를 주업으로 했으며 초등학교만 4개 있던 큰 섬이라고 했다. 최 의원은 자은초등학교를 나와 자은중3학년 때인 87, 아버지 같은 큰 형님을 따라 서울 암사동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이어 신암중으로 전학 동북고를 거쳐 수원에 있는 아주대학교에 진학,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험난한 세상과 맞서기 시작하는 서곡이 울리게 된 것이다.


 

, 살아온 여정이 살짝 드라마 같다. 수원과의 인연이라면?

- 아버님 같은 큰 형님을 따라 중3때 서울로 올라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강동구에 있던 동북고에서 나름 인생의 진로에 대해 고민도 했고 열심히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전교조 선생님들의 해직반대투쟁에 나서는 등 사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이후 진학에 몰두, 91년 아주대 경영학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우만동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수원에 대한 추억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주대 앞 진입로 양쪽이 거의 논밭이었고 식당이나 주점들이 몇 개 안 되, 학생들이 주로 먹거리를 사서 학교 안 캠퍼스에 먹방을 차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통기타도 치며 모여서 노래도 부르고 같이 암울한 사회에 대한 넋두리를 하던 시기로 그런 모든 것이 추억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회 상황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이어 육사출신 노태우 정권 후반부로 들어서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군부독재에 대한 잔상들이 많이 남아있어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활발한 시기였습니다. 저는 백골단에 의한 강경대열사(명지대91학번) 사망사건으로 학생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원과의 인연과 함께 치열한 학생운동이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 수원 아주대에서의 학생시절에 대한 전개는?

- 학생회 간부로서 민주화를 위한 활발한 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업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3, 결국 학점 미달로 제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948월에 군 입대를 하게 되었고 경북문경에서 26개월의 군복무를 성실하게 마치고 다시 사회에 복귀를 했습니다.

- 97년 복적에 이어 98년 아주대 부총학생회장을 맡으며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을 전개하던 중 학내문제로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받았으며 이후 집시법 및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되어 104일간 구치소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집행유예로 석방이 돼 다시 복학을 해 99년 말, 졸업을 하지 못한 채 후배들에게 짐을 넘기고 학생운동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 사회로의 진입과정은?

- 학교를 벗어나 처음으로 생업전선에 뛰어든 게 막내형님이 운영하시던 구리농수산물 도매시장 내에 있던 냉동수산물 도매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새벽에는 열심히 형님을 도와 장사를 했고 오후에는 학교로 가 수강을 해 2002년 드디어 11년 만에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8년 후 형님의 가게가 경영난에 처했고 학교선배가 건설현장소장으로 있던 강원도 인제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선배에게 측량기술을 배우며 현장 반장으로 건설장비와 건설인부들을 관리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2010, 정들었던 수원으로 돌아와 드디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 시기와 상황은?

- 2012년 대학 선배였던 김명욱 시의원의 권유로 김영진 총선 선거캠프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김영진후보는 남경필 후보에게 밀려 패했지만 정치신인이 4선의 여당 거물에게 5%정도 차이로 선전을 했기에 나름 수확도 있었다고 생각되며 김영진 후보가 강한 인상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때부터 저 역시 지역 정가에 얼굴을 알리며 지역정치인들과 교분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인적 인프라가 그때부터 형성되며 당시 유문종 이사장이 운영하던 재단법인 그린트러스트에서 3년가량 사무국장으로 재직을 했습니다.

- 그 후 재단을 나와 방역과 소독방면의 전문회사를 창업했습니다. 드디어 제 사업을 시작했고 그런대로 무난하게 운영을 하며 정치인들과 꾸준하게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 시의원에 출마하게 된 계기라면?

- 제 나름대로 수원에서 열심히 사업을 하며 지역정치인들과 의미 있는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2018년 지방선거 수원시 병지역구(인계동·우만1~2·행궁동·지동)에서 추가로 후보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때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에 출마원서를 제출했고 결국 저와 같이 출마를 희망하는 후보자 한사람과 공천심사위원회의 서류와 면접 등의 심사를 통해 인계동·우만1~2·행궁동·지동 지역구 민주당 최종 시의원 후보자(1-)가 되었습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민주당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고 수원 또한 민주당의 열풍이 상당히 강하게 불고 있었습니다. 무난히 선거에서 승리해 드디어 정치일선에 진출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선거는 긴장되기 마련이고 나름 치열하게 승부에 임했었습니다.

 

, 정치일선에 입문하기 까지 제일 힘든 시기가 있었다면?

- 제겐 학창시절이나 사회생활이나 모두 만만치 않은 시기였다고 생각됩니다. 경제를 포함한 주변 환경 또한 그리 양호하지 않았던 관계로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노력한대로 되지 않았던 것도 있었습니다. 제일 어려웠던 점은 구리농수산물 시장에서 형님이 운영하던 수산물도매점이 자금난을 겪을 때 보증을 섰던 관계로 신용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결국 5년 동안 긴축재정을 하며 열심히 노력한 결과 20197월에 경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 의원님이 생각하시는 정치와 보람 있던 순간들이라면?

- 저는 20대부터 일관된 한 가지 소신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공정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들을 대변해서 사회적 공감대와 삶에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시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해 일선에서 뛰다보니 벽에 부딪히며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무실에서 정책을 입안하기 보다는 민생현장을 직접체험해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는게 시의원들의 참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호매실장애인복지관 중증장애인들의 취약계층 공공일자리 참여 제공과 제 지역구의 이주민에 대한 도움 제공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 지역구민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 먼저 코로나19로 모두 힘든 시기를 맞고 있는 이때 지역구민들의 일상 또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계동 아파트단지 재개발사업과 팔달경찰서 건립, 신분당선 연장 공사착공 등 지역의 굵직한 사업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역구민들의 삶이 향상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 늘 여러분의 성원이 있었기에 제가 힘을 내어 지역민원에 한 층 더 매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고마움을 느끼며 지역의정활동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가정사와 의원님만의 좌우명은 무엇인지요?

 

대학 후배였던 아내는 역사문제연구회라는 학내 동아리에서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96년도 연세대 항쟁 때 참여, 연세대 학내에서 연행 된 후 학교를 자퇴했고 그 후 2001년 아주대 역사문제연구회동아리 졸업생모임에서 다시 만나 교제를 시작, 2년 만인 2003년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같은 운동권 출신으로 이념과 지향점이 같았던 게 서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결혼 후 갑작스럽게 다가온 힘든 시기를 늘 곁에서 저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준 아내는 제인생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내와의 사이에 1(15) 1(10)가 있으며 아들은 학급회장을 줄곧 맡을 정도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리더로서의 자질을 보이고 있는 매우 긍정적인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딸아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고 소중한 저의 보물입니다.

굳이 제 좌우명이라고 한다면 부딪히고 실천하라입니다. 인생은 생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늘 현장에서 체험하며 함께 호흡할 때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김대중 대통령이 강조했던 행동하는 양심이란 표현과 맥락이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고등학교시절부터 느꼈던 실천의 중요함과 그에 따른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제 소신이며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일선정치의 시의원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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