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로그인 회원가입
  • 서울
    B
    미세먼지
  • 경기
    B
    23℃
    미세먼지
  • 인천
    B
    미세먼지
  • 광주
    B
    미세먼지
  • 대전
    B
    미세먼지
  • 대구
    B
    미세먼지
  • 울산
    B
    미세먼지
  • 부산
    B
    미세먼지
  • 강원
    B
    미세먼지
  • 충북
    B
    미세먼지
  • 충남
    B
    26℃
    미세먼지
  • 전북
    B
    미세먼지
  • 전남
    B
    미세먼지
  • 경북
    B
    미세먼지
  • 경남
    B
    미세먼지
  • 제주
    B
    미세먼지
  • 세종
    B
    미세먼지
'조선팔도 부자들 모여라'…행궁 앞 팔부자거리
상태바
'조선팔도 부자들 모여라'…행궁 앞 팔부자거리
  • 경인경제
  • 승인 2018.08.16 17: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조대왕 화성 축조 당시 상업 활성화 위해 조성한 '조선의 신도시'
[연합뉴스] '조선팔도 부자들 모여라'…행궁 앞 팔부자거리


분당과 일산 등 1기 신도시가 새로 생기던 1989년 당시 시민들이 느낀 놀라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포화상태에 이른 서울 인구에 치솟는 집값으로 시름 하면서도 "논밖에 없는 곳에서 어찌 살아"라는 농담이 유행할 만큼, 전에 없던 도시가 새로 만들어진다는 일은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3년 뒤 도로가 생기고 관공서가 자리 잡고 고층 아파트가 첫 입주를 시작하자 시민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어느덧 '부촌'이란 이미지를 갖게 된 이들 신도시는 새 보금자리를 찾아 몰린 시민들로 벼 이삭만큼 빽빽이 거리를 채워나갔고, 20여 년이 지난 이제는 굳이 '신도시'라고 명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생활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 200년 전 조선에서 벌어진 신도시 사업

그런데 이런 신도시 조성사업이 200여 년 전 조선시대 수원에서도 대대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 축조 후 '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집집마다 부자가 되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한다)'의 정신으로 세운 팔부자거리가 바로 그곳이다.

"상이 높은 곳에 올라 고을 터를 바라보고 곁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6호였는데 지금은 1천여호나 되는 민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 되어 어느덧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으니 지리의 흥성함이 절로 그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 (정조실록, 정조 18년 1월 15일)"

1789년 정조는 화산 아래에 있던 옛 수원의 읍치(邑治)와 백성들을 현재의 수원으로 옮겨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한편 화성 축성을 시작했다.

이어 수원의 경제를 발전시켜 부유한 도시로 육성시키기 위해 전국 각지의 부자들에게 이자 없이 자금을 대출해 화성 성내에 점포를 차리게 해 주거나 전국의 인삼 상권과 갓 제조권을 허락했다.

당대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파격적인 혜택에 한성 부호와 전국 8도의 부자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이들이 한데 상권과 마을을 형성하면서 지금의 장안문에서부터 행궁 앞 종로 네거리에 이르는 팔부자거리가 형성됐다.

이곳은 당시 한성 육의전과 팔부자거리 외에 상설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 조선 8도 부자들이 모인 팔부자집

팔부자집은 팔부자거리내 형성된 부촌을 일컫는다.

팔부자거리와 팔부자집이 조성된 사실은 실록을 통해 확인됐지만 정확한 위치와 규모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학자별로 일부 의견이 갈린다.

다만 1897년 요셉 알릭스 신부가 천주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 팔부자집의 위치와 규모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편지에는 "수원에 팔려고 내놓은 집이 있다는 소식입니다. 팔부자집인데 약 30칸입니다. 값은 5천 냥을 넘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후 요셉 신부가 팔부자집을 구매한 뒤에는 "조선 왕국의 8도를 대표하는 최고 부자 8명이 똑같은 설계로 나란히 8채의 집을 지었습니다. '팔부자집'이라는 이름이 거기서 나왔습니다. 본인이 산 집은 그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제일 잘 보존된 것입니다"라고 재차 서신을 보냈다.

이 편지의 내용과 당시의 주택 소유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팔부자집은 화홍문 아래로 수원천을 따라 가장 넓은 거리가 형성된 길목에 연달아 서 있던 기와집들을 말한다.

당시 어느 가문이 살고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각 주택의 규모는 적게는 111평부터 많게는 322평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됐다.

이들 팔부자집 주변으로 비단을 파는 입색전(立色廛), 해산물을 팔던 어물전(魚物廛), 소금을 파는 염전(鹽廛), 유기 등을 파는 유철전(鍮鐵廛) 등이 형성된 점을 미뤄 이들 팔부자들은 재력을 토대로 일대 상권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일제강점기 이후의 몰락

외세가 득세하던 1910년대 팔부자거리는 전통적인 부와 명예의 거리에서 벗어나 가장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다.

행궁 건너편으로 교회가 들어서고 팔부자집 터에 천주교 성당이 세워지며 거리의 색채가 다소 변했다.

본격적으로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기존 상권은 힘을 잃기 시작했고, 거리 안에 있던 조선후기 훈련도감 중 하나인 중영(中營)이 일본군 수비대 주둔지로 바뀌는 등 국가의 몰락에 따라 팔부자거리도 점차 무너졌다.

그럼에도 팔부자거리는 1980년대까지 수원 상권의 중심 역할을 톡톡히 하며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라는 명성을 지켜왔다.

하지만 이후 북수원과 영통지구 등이 개발되며 인구와 상권이 줄어들었고, 현재는 수원 내에서 가장 개발이 덜 된 구도심 중 하나로 전락했다.

◇ 팔부자 문구 거리, '행리단길'의 탄생

현재 팔부자거리에는 1980년대부터 문구점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형성된 문구 거리가 있다.

한때는 점포가 22곳까지 늘며 성행했지만, 여느 동네 문방구처럼 이곳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금은 12곳으로 줄어든 상태다.

그러나 2011년 시작된 수원 마을르네상스 사업이 문구 거리가 형성된 행궁동 일대에서 진행되며 예전보다 활기를 되찾은 모습이다.

떠난 문구점들의 빈자리는 벽화와 팔부자거리를 상징하는 조형물들로 채워졌고, 해설사와 함께 마을을 돌며 역사 이야기를 듣는 '왕의 골목' 프로그램도 활발히 운영 중이다.

무엇보다 팔부자거리에 활기를 더해주는 건 맛집과 공방, 카페 등이 어우러져 젊은 층의 발길을 끌고 있는 '행리단길'이다.

행리단길은 행궁동과 서울 이태원 부근의 유명 상업 거리인 경리단길의 명칭을 합쳐 만든 말로, 구도심인 행궁동에 파스타와 디저트 음식점 등이 들어와 독특한 분위기를 내자 SNS를 중심으로 퍼진 것이다.

35곳가량의 음식점과 카페가 모인 이곳은 이제 매 주말 주변 도로에 차량정체를 부를 만큼 수원의 대표 명소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행리단길이 떠나간 손님들을 끌어모으자 주변 상인들도 점차 활기를 띠는 모양새다.

식당을 운영하는 황모(58·여)씨는 "예전엔 이따금 술 한 잔씩 하러 들르는 주변 상인들과 주민들이 전부였지만 이젠 젊은 손님들이 찾아와 사진도 찍고 식사도 한다"라며 "거리가 점차 활기를 띠는 것 같아 즐겁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수원문화재단 관계자는 "화성행궁과 팔부자거리라는 역사적인 스토리를 골목 안으로 넣어 방문객들에게 볼거리와 즐길 거리, 먹거리를 함께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라며 "주변 미술관과 옛 공방, 한옥을 활용한 체험행사도 마련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