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온 천지에 내린 눈은 무장한 전사처럼 전위적 행위를 자행하듯 쏟아져 내렸다. 온 세상은 거침없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러고도 시간을 다투어 그날 하루를 다 쓰고도 모자라는 듯 쏟아 부었다.
마치 옛 전설 속 눈의 화신을 불러내 지워지고 망쳐버린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술수처럼. 어찌 보면 치매환자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태세였다고나 할까.
소리없이 내리는 눈발 속으로 이미 마음은 무엇인지 모르는 형태로 줄달음을 치고 있다.
주체하지 못한는 빈약한 외침은 하르륵 거리며 무소유의 세계를 알기나 하냐며 들이대는 번뇌와도 같다.
멈추지 않는 눈발 덕분에 정신없이 방황하는 마음마저 눈 속으로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바람의 심장을 할키듯 매섭게 소용돌이 친다.
무엇이든 생각의 진동을 암시적으로 느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문득 누군가 그 해답은 네가 가져 온거야 라고 비아냥거리는 것 같다. 그런 순간을 그저 터트리고 싶었다며 헤죽거리는 것도 같다. 이유 없는 무색의 감정을 동반하며 오는 눈, 그 모습을 즐기는 사람들, 다수의 상상을 저 눈발은 알고 있을까.
그저 그런 눈을 순결이다, 깨끗하다라고 하지만 그 표현은 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챈 후의 처신은 어찌하라고.
언제나 빈 가슴에 남겨진 그 무엇은 외로움이나 그리움으로 허허로이 어딘가에서 한다발의 눈이 되어 쌓이고 있다.
허원을 할 것이라고 했다. 사제 서품을 받기 전 한 달 남짓, 속세에 나와서 세상을 돌아보라고 했다며 말했던 사람. 널 생각하기도 했다는 말은 지금도 뇌 속의 한 부분을 지지는 것 같다..
찌르르 명치끝이 흔들렸던 순간. 오메가의 알파파가 밀려 왔었다.
그 어떤 것도 상상해 보지 않은 백지 속에 그의 말은 천둥번개였다.
평생을 그 말에 매달려 큰 산처럼 남겨진 물음표, 지금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처럼 쏟아지는 하늘의 반란을 확실하게 알고 싶어지는 기분과도 같다.
신이 있다면 무엇을 주기 위해 길을 가는 것일까, 원망스러웠다. 하염없이 내리는 저 눈발 속의 무엇처럼, 거침없이 무너지는 순결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왜 그렇게 뜨거웠을까.
어쩌면 저 눈발도 그런 근원을 가지고 끊임없이 암묵적으로 쏟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동안 눈이 오는 날이면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를 찾아 떠나고 싶었다. 어디에 있든 그의 거취는 신문에도 방송에도 대서특필로 나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너무나 숭고해서 허원의 그날, 하루종일 내 마음에는 눈이 내려 쌓였다. 좋은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절대절명의 기도였다.
이렇듯 몇십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 기도는 변하지 않았다.
다. 어쩌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날의 약속은 잠자고 있던 자아를 쉬임없이 끌어당기고 있다.
눈 내리는 벌판과 허공이 마련한 무심의 세계로 자꾸만 잡아당기며 그가 부른다.
그가 가는 길, 이미 성자의 모습으로 만인의 사제가 되어 눈으로 내리는데, 창밖에 이불처럼 덮어쓴 거대한 신이 지그시 들여다보고 있는듯 하다.
때를 잘 맞추어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으로 인해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더니. 특히 그가 눈더미가 되어 눈의 신으로 내 곁에 온 것일지도 모른다.
거대한 눈더미로 예나 지금이나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전설이 되어 내리는 눈, 어디선가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날.
내 안의 나를 비우고 비천해지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눈이 오늘도 속절없이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