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란 하늘을 이고 절정에 오른 더위가 가쁜 숨을 쉬며 달리는 날 마음도 함께 구름 위를 간다. 하얀 구름 뭉치가 뭉게뭉게 여름의 하늘을 뒤 덮고 있는 장관은 혼자 보기에 아까울 정도다. 요즘 들어 부쩍 하늘을 보는 이유는 마음의 무게를 덜어 놓고 싶은 내면의 피곤 때문일 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하루하루 삶이 시계는 달리는 속도가 만만치 않다. 잡지 못하면 잡힐 수 있는 위기의 경계, 도저히 균형을 맞출 수가 없다.
요즘 일기예보는 잘 맞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면 수원에서 비가 오면 화성도 비가 와야 할 것 같은데 소나기조차도 그렇지 않다. 어떤 날은 아예 수원에서 비가 오지만 인근 화성지역에서는 비는커녕 뜨거운 햇살만 눈부시게 비치고 있다. 그 반대 현상도 마찬가지다.
소나기가 오는 하늘은 전초전이 예사롭지 않다. 언제 몰려왔는지 검은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금방이라도 온 세상을 뒤엎어 버릴 것처럼 천둥번개와 함께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 일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남겨 두고 싶어서 핸드폰이나 카메라로 찍는다. 사진을 찍지는 않지만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바로 소나기구름 속에 갇혀서 내리 쏟는 소나기를 직접 맞아 본 사람은 그 심정을 공감하리라. 그 광경을 벗어나 조금만 외곽으로 가면 의외로 바닥조차 뽀송뽀송 말라 있으니 기이함을 느끼게 된다. 아파트에선 소나기가 오는 소리를 강아지들이 먼저 알고 여기저기에서 짖어댄다. 사람보다 강아지들이 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는 듯하다. 다른 해 보다 올해는 부쩍 그런 경험을 많이 한다고 생각되어진다.
반대급부적인 일도 생겨난다. 하얀 뭉게구름이 두텁게 하늘을 덮는 날이 있다. 그 전에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검은 소나기구름만 무서운 게 아니고 하얀 구름의 두께가 상상을 초월하며 둥싯거리는 몸짓으로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게 더욱 무섭다. 아슬한 아름다움과 동시에 상상속의 신령이 하얀 구름 속에 숨어 있는 듯도 하고 이불 솜같은 구름체가 몽싯몽싯 움직이면 그 속에 신비한 영이 눈을 뜨고 사방을 살피고 있는 것도 같다.
사람들은 중국에서 인공비를 만들어 내리기 때문에 그 여파가 서쪽 우리 한국에까지 미친다고 한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냥 지나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살짝 위기감에서 오는 감동은 다른 것 같다. 하얀 구름의 근원이 어떻든 간에 신비감을 담고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이는 하늘구름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무한한 신비의 영역이기도 하니까. 그런 하늘을 보다가 나도 몰래 ‘어머나, 세상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되니 이 또한 살아있음에 감사할 부분이 아니고 무엇이랴.
눈부시도록 파란하늘과 백양목 같은 하얀 구름덩이의 신비에 더하여 여름의 녹음은 짙어갈수록 위대하며 성스럽기까지 하다. 누가 저 왕성한 녹음의 파노라마를 우리에게 만들어 주었을까. 자연의 위대함에 인간이 머리를 숙이는 순간이다.
녹음 속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수많은 소리를 생각해 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의 교향악인가. 그 중 이름 없는 풀새들이 낮게 날아올라 집 앞 창가에서 재잘거린다면 더없이 반갑고 즐거운 풍경일 것이다.
“얘들아 뭘하고 있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함께 날고 싶고 함께 지저귀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것도 한참씩이나 지저귀다 가는 것을 보면 마치 동네 마실 나온 사람들과 똑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칫하면 날려 보내기 쉬운 기척을 스스로 조심하여 잠재운다.
나뭇가지사이로 뛰어 내리기도 하고 이마를 맞대고 도란거리며 무슨 말인지 쉴 새도 없이 종알거리는 풀새들의 모습을 1미터도 안 되는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순간은 그 어느 것보다 자랑스럽다. 어느 누가 이리 귀한 장면을 보여 주는가. 한적한 도시의 변두리에 사는 진귀한 맛일 테니. 울울창창 녹음이 그 마지막을 달리는 요즈음 우리의 청춘도 그러하듯이 울창한 숲을 만들었으리라. 이제는 마음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휴거의 시간을 가져볼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우리 인간들도 어찌 보면 자연의 한 부분임을 잊지 않으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함을 새삼 느낀다. “오! 위대한 자연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