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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향기] 고스란한 기억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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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향기] 고스란한 기억의 풍경
  • 이경훈 수필가
  • 승인 2024.06.20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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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서 자란 집이 아직 있는,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에 갔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가 본 지가 언제였는지 어슴푸레하지만, 아직도 단골 메뉴처럼 가끔 내 꿈에는 그 집이 등장한다. 꿈속에서 나는 아이기도 하고 때론 현재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명확한 구분 없이 어른 아닌 그저 ‘나’로 되살아나곤 했다.

아! 감탄사도 아닌 그렇다고 탄식도 아닌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여기였구나. 수십 년 동안 고정된 장면들이 머릿속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장소였다. 작은 설렘은 있었지만 대체로 담담한 발걸음이었는데 골목 어귀에 다다르자, 가슴이 떨리면서 방망이질을 쳤다. 의지와 상관없이 입은 비죽대기 시작했고 어느새 예기치 못한 감정이 몰아치며 눈가가 뜨거워졌다.

귀퉁이가 허물어진 담장 위에는 붉은 덩굴장미가 예전처럼 화려하게 흐드러져 있었다. 낡은 주변과는 무관하다는 듯 이렇게 고스란한 풍경으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지만 그야말로 온전한 해후였다. 원가족(原家族)이라는 울안에서의 나날은 삶의 어려움 같은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하던 지극히 안온한 시간이었다.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대문은 여러 번 칠을 했을 텐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색깔처럼 푸른색인 것이 신기했다. 어쩌면 대문 앞에 선 순간 머릿속 회로가 착각을 일으킨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문 안뜰에서는 친구들과 둘러앉아 공기놀이와 소꿉장난을 했으며 친지들이 드나들기도 했다. 이웃집과 마주한 담장 아래에는 회색 벽돌로 경계를 지어놓은 기다란 화단이 있었고 엄마가 가꾼 꽃들이 계절마다 소담하게 피어있었다. 오며 가며 붉고 긴 깨꽃을 따서 쭉 빨아먹으면 느껴지던 달착지근한 액체의 맛이 입속을 맴돌고 있다.

골목 입구 큰길과 만나는 곳에는 커다랗고 위쪽이 편편한 돌이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두 살 아래 동생을 힘겹게 업고 가서 그 돌 위에 앉혀놓고 퇴근하시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형제들과 아랫목에서 이불 속에 발을 넣고 만화책을 빌려다 보던 평화로운 어느 날도 있었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하나둘씩 집을 떠날 때의 허허로움도 있었다.

칼릴 지브란은 ‘추억은 일종의 만남’이라고 했다. 추억을 만나면서 잊혔던 감자알 같은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순서 없이 딸려 나오고 있었다. 만남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어릴 적 기억의 소환은 소중하고 유쾌했다. 생각해 내는 것만으로도 적당히 따뜻한 물속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들어앉은 것만 같은 시절이 한 묶음으로 떠올랐다.

그런 평온한 순간들은 견 섬유의 부드러운 촉감이다. 크림에 샤인 머스캣이 올라가 있는 마카롱의 진한 달콤한 맛이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와 같은 부드러운 선율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찬찬히 둘러보니 주변 집들이 모두 낡았고 페인트칠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담장과 대문은 색이 바랜 채 몹시 추레했다. 세월 따라 나도 저렇게 똑같은 낡은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유년의 집이 저리 낡고 허물어져 가고 있으니 나도 꼭 그만큼 나이를 먹고 닳아져 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이번에는 더 진하게 훑고 지나갔다. 혼곤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탈한 현실에 대한 안도감이 다가와 날숨을 크게 한번 내쉬라며 등을 다독거렸다.

동생을 앉혀놓고 아버지를 기다리던, 바위라고는 표현할 수 없는 납작하고 작은, 돌덩어리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아버지, 엄마, 형제들, 그리고 순간의 형상으로만 기억되는 친구들이 지난날을 배경으로 박제처럼 고정된 채 가슴속을 넘나든다. 삼원색과 그 사이를 채우는 여러 색깔만큼 수많은 감정을 뒤로하며 걸어 나오는 나를 배웅하던 추억은, 그사이에도 쉼 없이 한순간의 두께를 더 입히고 있었다.

 


이경훈 수필가
이경훈 수필가

약력

한국문인협회회원. 경기한국수필가협회회원. 문학과 비평회원

수상 : 월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부문 동상
경기한국수필가협회 공모전 우수상
김해일보 남명문학상 공모전 수필부문 우수상
문학과 비평 작가상
신정문학회 공모전 대상

수필집 : 뜻밖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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