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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읽는 수필] 사라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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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읽는 수필] 사라진 시간
  • 임수진 수필가
  • 승인 2022.02.21 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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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 헬스장에서 내려다보면 높다란 아파트 사이로 길이 이어졌다. 상가를 따라 굽이굽이 물결치는 골목길. 헤어숍, 내과, 마트, 커피집, 학원, 부동산 등 다채로운 간판이 멀게 혹은 가까이 보였다. 입주한 가게 중에는 내가 머리 손질을 맡기는 미용실도 있고, 아이스크림, 편의점, 빵 가게도 있다. 가게는 용도에 어울리는 이름과 개성적인 디자인과 색(色)을 입었다.

24절기 중에 가장 먼저 찾아오는 입춘(立春)이 지났다. 첫출발을 상징하는 날이라서 설렘을 실은 문자가 많이도 오갔다. 옛사람들은 이날, 대문 기둥이나 대들보, 천장에 입춘과 관계된 좋은 글귀를 붙이고 양반가에서는 입춘첩(立春帖)을 새로 써 붙였다. 제주도에서는 입춘굿을 하는가 하면 농경사회 때는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서 그 중 성질이 급해서 제일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을 그 해 풍작으로 보는 농사점을 쳤다고 한다.

모든 절기가 자연의 흐름에 따라 지어졌지만 유독 입춘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건 길하고 상서로운 일이 두루 이루어지는 ‘시작’이 주는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 며칠, 동장군의 기세가 한동안 이어졌다. 청명한 하늘빛에 홀린 듯 나섰다가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에 된통 당하고 들어오는 날이 많아지면서 실외 산책을 끊었다. 매일 다니던 길이 눈에 선했지만 아쉬운 대로 실내에서 운동했다.

우수(雨水)가 가깝자 악동 같던 한파도 주춤,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은 순해졌다. 아직 한두 번의 한파가 더 있겠지만 웅크렸던 가슴은 펴지고 태양과 마주할 자신도 생겼다. 오랜만에 발걸음도 가볍게 야외로 산책을 나갔다. 실내체육관에서 러닝머신 위를 걷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맛이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아직 앙상한 가로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려보고 살살 간지럼도 태워본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커피집 안을 기웃거리고 빵집의 따뜻한 불빛과 갓 구운 빵의 치명적 냄새에 마음을 빼앗겨 갈등의 시간도 갖는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문을 닫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준 것에, 버텨준 것에 감사한다.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더 큰 게 어디 사람뿐일까.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산책로로 진행했다. 며칠 더 있으면 봄비 내리고 싹이 트는 우수다. 3월 초가 되면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경칩(驚蟄)이고, 춘분(春分)이 되면 밤은 점차 짧아지고 낮은 길어진다. 햇볕을 쬘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다. 나무에 물이 차오르듯, 어린아이의 심장박동처럼 모든 이의 일상에도 희망의 꽃이 피었으면 싶다.

음지에 쌓였던 눈은 물로 돌아가고 봄볕은 어머니의 손길로 그늘 깊은 곳까지 세심히 쓰다듬어 줄 것이다. 꽁꽁 언 땅을 뚫고 고개를 내밀 냉이와 노란 눈을 띄울 생강 꽃과 산수유, 개나리를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홀로 생각에 빠져 걷는데 앞에서 누군가 아는 체를 한다. 쳐다보니 산책로를 오갈 때 마주친 적이 있는 분이다. 낯은 익지만 말을 섞긴 처음이었다.

“요즘 왜 안 보였어요? 열심히 운동하던 분이 안 보여 궁금했습니다. 아프셨던 건 아니죠?”

이웃의 한 마디가 음지에 쌓인 눈을 녹인 햇살 같았다.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오가며 스친 인연이 안위를 걱정해 주니까 감동은 두 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나는 어째서 먼저 마음을 내지 못했을까 부끄럽다.

아무 일 없는 척, 씩씩한 척 표정관리를 하며 지냈지만 한파와 코로나, 델타와 오미크론으로 이어져 오는 동안 우리 모두는 조금씩 외로웠는지 모른다. 마음이 무너지고 부서지기 쉬운 때, 겨울이 봄을, 주문자가 택배기사를, 자식이 부모를, 옷 가게가 빵 가게를, 소머리국밥집이 여행사를, 약국이 목욕탕을, 당신이 나를, 내가 그들을 걱정하고 응원하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 에너지인가.

아프지 마세요.라는 이웃의 말이 내겐 입춘이고 경칩이다. 차디찬 땅속 어딘가에서 시작된 봄의 기운이 공기 중으로 뻗치고 곧이어 봄비도 내릴 것이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 올봄엔 사라진 시간을 되찾아 여행지마다 사람 꽃이 만발하길 기대해 본다.

 


임수진 소설가, 수필가
임수진 소설가, 수필가

약력

수필가, 소설가
월간 「수필문학」지에 『아름다운 화석』으로 등단
현진건문학상 신인상, 경북일보문학대전 소설대상
수필집 『나는 여전히 당신이 고프다』, 『향기 도둑』
수원문인협회 수필분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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