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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무혼이 잠들어 있는 독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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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무혼이 잠들어 있는 독산성
  • 전경만 기자
  • 승인 2016.06.16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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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기술이었던 백제의 축성기술 일본으로 전해져
[경인경제 전경만 기자] 백제의 무혼이 잠들어 있는 독산성

백제 근초고왕이 일본의 왜왕에게 하사 했다는 ‘칠지도’의 해석을 놓고 한`일간 의견이 분분했던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칠지도가 백제의 복종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지만 결론은 백제의 왕이 일본왕에게 나라를 잘 다스려 백제의 뜻을 세상에 알리라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고대 백제의 문물은 삼국 중에 최고 이었다는 것에는 이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백제의 찬란한 문물은 한반도 한강유역부터 호남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으며 멀리 일본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백제의 유적은 한성백제시대의 ‘몽촌토성’이 있으며 석성(石城)으로는 오산 지곶동 소재의 독산성이 있다.

오산 독산성은 백제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직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산성의 모양이나 형태만을 가지고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산성 중에 가장 독특한 형태의 성곽이다. 우리나라 산성의 윤곽을 보면 대개 둥그런 타원형이다. 반면 독산성은 직사각형 형태이며 직선과 각이 산성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독산성의 진입로는 총4곳이다. 동서남북의 진입로가 있으며 이중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서문과 남문이다. 동문과 북문은 세마대지에 속하는 천수기단의 출입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먼저 동문으로 들어서면 우리나라의 산성에서는 보기 힘든 ‘ㄱ’자 모양의 출입문을 지나가게 된다. 밖에서 보면 현도문 양식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독산성 동문이 일본성곽의 상징인 마스가타형식의 출입문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산성이 만들어진 시기에 일본에는 이런 형태의 산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때 오늘날 일본이 자랑하는 산성의 구조는 백제 독산성의 독특한 양식으로부터 출발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흡사 왜성이라고 착가되는 이런 ‘ㄱ’자 형태의 출입문 구조는 안에서 밖을 볼 수 는 있지만 밖에서는 안쪽을 염탐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동문을 빠져나와 독산성을 쳐다보면 보적사라는 사찰이 있다. 최근 건물을 증축한 보적사 때문에 사적 140호인 독산성의 원형이 많이 파괴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보적사 뒤쪽으로 보면 약 2m 높이의 성벽들이 3단으로 쌓여 있다. 이런 구조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이 남해안 일대에 축성한 왜성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제곽’이라고 하는 이런 구조는 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지휘부를 쌓고 지휘부 아래 외부 출입문을 두는 형태를 말한다. 독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세마대지와 독산성 동문은 이런 구조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즉 지휘부의 비상출입문이 바로 독산성 동문이다. 동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동문치’가 보인다. 성곽에서 바깥쪽으로 3*4m의 크기이며, 외부로 튀어나온 이 구조물은 동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동문으로 오는 모든 출입자와 적군은 반드시 동문치를 거쳐야만 출입할 수 있다.

동문치에서는 용인이 정면으로 보이며 용인방면에서 오는 적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동문치에서 다시 50m를 더 걸어가면 동북치가 나온다. 동북치는 커다란 자연석위에 치를 만들었다. 수원과 황구지천을 바라보고 마주하고 있는 동북치를 기준으로 독상성의 성벽은 북쪽 방향을 향해 90도 꺾인다. 대개의 산성들이 둥근 형태로 성벽이 이어지는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모습이다. 또 동문치에서는 북문과 북문아래의 가파른 경사면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시선의 끝에는 ‘북서치’가 보인다. 동문치와 북서치 사이의 성벽은 대체로 직선이지만 ‘횡시’의 구조를 보인다. 횡시는 인위적으로 성벽을 성 안쪽으로 휘게 만들어 적이 침입할 때 방어를 쉽게 하고 적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기위한 구조이며 일본 성곽의 중요 특징이기도 하다.

가파른 절벽위에 견고하게 만들어진 북쪽 성벽 아래로는 황구지천이 흐르고 있어 자연스럽게 ‘해자’역할을 하고 있다. 해자는 물을 이용해 성을 방어하는 전형적인 일본성곽의 특징이다. 과거 화성의 깊숙한 곳까지 바닷물이 흘러들어왔음을 감안하다면 황구지천은 크기로 볼 때 해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황구지천의 뻘을 통과한 적들이 다시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라 독산성의 북쪽 성벽을 타고 성에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북쪽 성벽의 한가운데에는 북문이 있다. 마치 암문형태의 작은 문에 해당하는 북문은 세로 2.4*가로 2m의 크기이며 독산성 지휘부의 두 번째 암문에 해당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슷한 일본왜성 중에는 정유재란 당시에 만들어진 울산왜성이 이런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울산왜성은 천수기단에서 강 쪽으로 직선방면으로 경사면에 출입구를 만들어두었다. 서생포왜성도 이와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북서치에서는 화성의 서해안 방향을 조망할 수 있다. 북서치에서 또 다시 성벽은 남쪽을 향해 직각으로 꺾인다. 치를 중심으로 성벽이 직각으로 꺾이는 구조는 오늘날 일본성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구조이다. 서쪽 성벽의 한 복판에는 독산성에서 두 번째로 큰 현도문 양식의 출입문을 볼 수 있다. 서문의 출입문 형태는 많이 훼손되었지만 진입하는 적군이 안쪽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문 안쪽에 둔턱을 세워 성문 내부를 가리고 있다. 주로 고구려에서 이런 식의 성문 방어를 했다고 한다. 백제 이후 조선시대에는 독산성 서문이 경기남부와 수원을 잇는 삼나로의 한 구간이 됐다.

서문을 지나 성벽을 따라 가면 남서1치가 보인다. 남서1치를 기준으로 다시 직각으로 꺾인 남쪽성벽은 가장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쪽 성벽은 3개의 ‘치’와 암문 그리고 독산성의 주 출입문인 남문이 있다. 또한 성벽의 배수구가 있는 것을 보면 남쪽성벽은 조선후기에 많이 증축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조선 정조의 주력군이었던 장용위가 주둔했다는 기록으로 보아도 독산성은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성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독산성의 남문은 현도문이다. 독산성의 모든 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현도문 위에 ‘루’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또 남문 축성에 상용된 돌들의 크기와 모양도 조선후기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백제의 성곽축성에 사용된 돌들이 주로 작고 다듬어진 돌들이라면 조선시대에는 바위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성곽을 만들었기 때문에 돌들의 크기가 일정하고 큰 편이다.

남문을 기준으로 동쪽으로는 가파른 경사를 이루며 성벽이 이어지고 있다. 반면 남문에서 서문사이에는 비교적 평탄한 대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각종 건축물들이 자리 잡았던 집터들이 산재해 있다.

또한 남문을 중심으로 경사가 시작되는 내부에는 내성으로 보이는 두 개의 성벽들이 내부를 향해 뻗어있다. 잡풀과 흙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그것이 백제시대의 독산성 원형 구조이며 서문과 남문은 조선시대에 증축된 성곽 구조물로 해석되고 있다. 즉 독산성은 외곽으로부터 내부에 이르기 까지 적어도 5개 정도의 계단식 내부 축성이 있으며 이것을 풀어내면 백제 축성의 비밀도 자연스럽게 풀릴 것으로 보고 있다.

남문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가파르다. 오르다 보면 성곽보존에 공을 들이지 않아 곳곳의 땅이 빗물에 파여 성곽훼손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성벽과 독산성 원림 사이의 거리도 유지하지 않아 잡풀들이 성벽을 타고 올라 보기에 민망하기까지 하다. 성벽과 숲 사이에는 반드시 공간이 필요하다. 성벽위에서 화살의 유효사거리까지의 거리는 꼭 비워두어야 한다. 그런데 독산성의 모든 성벽에는 그런 거리를 유지하지 않았다. 아직 문화재 보존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독산성의 남문과 동문 사이에는 두 개의 치가 존재한다. 동문 왼쪽에 있는 남동1치는 독산성 동문과 남문을 직각으로 꺽는 기준점이 되고 있으며 남동2치는 경사면에 위치하면서 오늘날 오산 세교(남쪽 방향)를 조망하고 있다.

독산성은 주변에 산세가 없어 높이 208m에 불과하지만 독산성에서는 수원과 화성, 오산, 용인의 모습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독산성의 ‘독’은 항아리를 뜻한다. 그만큼 가파른 절벽위에 테뫼식으로 만들어진 성이 독산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독산성에 숨어들은 조선군을 포위했다가 그냥 물러난 것은 독산성을 점령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독산성은 백제의 기술과 무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독산성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기도의 모습은 가슴을 애잔하게 만든다. 서기 660년 부여에서 백제의 의자왕이 당나라군에게 포로로 잡혀가자 경기도에 남아 있던 백제군은 지금의 변산반도 일대로 남하한다. 그리고 서기 663년 백제부흥을 위해 일본 왜군과 연합해 백천강에서 동북아시아 최초의 4개국이 참전한 피의 혈전을 벌였던 역사는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패한 백제의 마지막 황자 ‘부여풍’과 백성들은 일본 규슈로 망명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독산성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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