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수필] 바람이 나를 부를 때

2026-11-05     김은주 수필가

  가을은 저물어 가면서 더욱 깊어진다. 날이 갈수록 저녁노을은 화려해지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 양옆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는 서서히 빛을 덜어 낸다. 한여름 짙푸른 그늘을 드리우던 잎들이 어느새 누렇게 바래 하나둘 가지를 떠난다. 어젯밤 내린 비에 젖은 낙엽들은 아스팔트 위에 몸을 누이고, 그 위로 늦은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는다. 한 계절이 제 빛을 거두어들이는 풍경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길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속도를 늦춘다. 젊은 날에는 단풍의 화려함에 눈길이 머물렀다면, 이제는 빛바랜 잎과 비어 가는 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사라지는 것에도 저마다의 빛깔이 있다는 사실을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어느덧 내 삶에도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예순의 언덕을 넘어서면서 계절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젊은 날에는 늘 무엇인가를 이루려 서둘렀다. 가족의 하루를 살피고 해야 할 일들을 감당하는 사이 계절은 몇 번이고 바뀌었다. 누군가의 아내로, 어머니로 살아온 시간이 소중했지만, 때로는 그 안에서 나 자신의 목소리가 희미해지기도 했다. 이제는 무엇을 더 이루어야 하는가보다 남은 날들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한다.
  아침이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정원에 나선다. 가을 정원에는 대봉감 일곱 개가 붉은빛을 더해 가고 있다. 잎이 성글어질수록 감은 더욱 선명해진다. 서두르지 않고 제 속도로 익어 가는 열매를 바라보며 나의 시간을 생각한다. 오래 견디고 기다린 끝에 비로소 얻는 빛깔이 있다는 것을 저 열매들이 말없이 일러 주는 듯하다.
  가을나무는 비워 낼수록 제 모습을 드러낸다. 무성한 잎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가지의 굴곡이 드러나고, 그 사이로 하늘이 넓어진다. 젊음의 빛깔은 조금씩 옅어지지만 그 자리에 오래 살아온 시간의 무늬가 남는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삶을 바라보는 여유는 세월이 내게 남겨 준 선물이다. 물론 나이가 든다는 일이 언제나 담담한 것만은 아니다. 거울 앞에 서면 깊어진 주름이 낯설고, 예전 같지 않은 몸의 움직임에 마음이 잠시 멈칫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주름에도 웃었던 날과 견뎌 낸 시간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가을이 봄의 빛깔을 흉내 내지 않듯, 나 또한 지나간 젊음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
  저녁 무렵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플라타너스는 노을을 받아 붉고 깊은 빛을 띤다. 하늘은 화려한데 땅 위의 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빛을 잃어 간다. 저무는 하늘과 내려앉은 잎들이 서로의 빛깔을 받아 주며 하나의 계절을 이루고 있다.
  지나온 삶에도 환한 날과 긴 그늘이 있었다. 뜻대로 이루어진 일보다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 일이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한 시절도 헛되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기쁨은 기쁨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나를 이 자리까지 데려왔다. 
  세월은 많은 것을 가져갔지만, 그 빈자리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남겨 놓았다. 이제는 작은 바람에도 계절의 숨결을 느끼고, 평범한 하루에서도 삶의 온기를 발견한다. 지나온 시간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더 많이 가지는 기쁨보다 지금 가진 것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다.
  집에 도착하니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다. 가지 끝에 매달린 대봉감 일곱 개가 저녁빛을 받아 한층 붉다. 무성했던 잎들이 떠난 자리에서 열매는 제 빛깔로 익어 가고 있다.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서늘하지만 매섭지 않고, 쓸쓸하지만 외롭지만은 않은 바람이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저무는 하늘을 바라본다. 저무는 것들이 모두 쓸쓸한 것은 아니다. 어떤 빛은 저물 무렵에야 비로소 제 빛깔을 얻는다. 나의 가을도 그렇게 깊어지고 있다.

 


김은주 수필가

약력

저서: 기억의 강에 머무는 것들

바람불어 꽃씨 날리면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공저)

현재: 늘솔길교육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