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의 문학광장] 가을의 화두 시간의 경계도 물들이는가

2026-10-22     정명희 시인·수필가 (경기문학인협회장·경기산림문학회장)
정명희 시인·수필가·아동문학가

  가을이 한 잎 두 잎 물들어 간다. 흩날리는 가을바람에 내려앉은 낙엽 한 장, 고개 숙여 집어 드니 마음도 가을인가 스르르 물들어 간다.    
  
  밤낮으로 소란스럽던 벌레들마저 계절 탓인지 사라진 자국은 낙엽위에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있다. 벌레들의 생존이 달린 사각거림이 여운으로 묻어 있는 낙엽위의 그림. 우리의 인생에 드리웠던 아쉬움과 연민의 붓 자국의 함축이다.        

  이런 시간 흐름 속에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또 하나의 상념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너무나 맑고 순하다. 길 위로 높아만 보이던 파란 캔버스에 구름을 안치고 노는 하늘 그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마음이다. 마음이 헛헛해서 어느 공간이라도 쉴만한 곳 둘러보다 결국은 바라보는 하늘이 가을엔 더 많아지는 건 여름날의 폭우와 무섭도록 덮여오는 공포와도 같은 먹구름이 잘 안보인다는 것이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 속으로 살포시 떨어져 내리며 무슨 말인지 할 것만 같은 하늘이 슬몃슬몃 내려온다. 토닥이며 날 보라는 듯 깊은 눈길을 던지며. 하늘은       
  
  얼마 전까지 푸르던 문장이었던가, 세 번째의 계절 앞에서 가을이란 대명제 앞에 단풍이란 이름이었다가 낙엽이 되는 문장을 고르는 작업
  추수라는 서사도 있지만 이별과 맞물린 별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고되고 헛된 것에서 탈피하고 싶은 내면의 소리일 게다. 이런 생각은 분명 공허감과는 별개라는 변명을 하고 싶다.      
 
  가을의 물결은 탄성을 터트리게도 되고 아쉬움에 한숨을 쉬게도 한다. 바람일지도 모르는 물결이 쓰다듬다가 떠나가는 길목위에 포장이라도 하듯 현란한 색채로 다가오는 가을에겐 헷갈리는 사유를 동반한다 .

  지난주 보다 오늘은 더욱 아침의 ChatGpt와 구글의 제미나이가 기어이 사고를 치고 있다. 거대한 위협일수도 눈부신 비약일 수도 있는데 자연 앞에 과연 떳떳할 수 있는지 물어 보고 싶다.

  누군가 들고 온다. 자랑스럽게. 어제의 AI 계절시 보다 오늘 아침의 AI 계절시는 훨씬 세련되게 생산되어 왔다며 놀랍다고 한다. ChatGpt의 제너러티브 generative가 말하듯 '창조'되어 나왔다는 말이 맞는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왜 가슴은 자꾸만 철렁철렁 울렁울렁해지는 것일까. 당혹감도 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생각하다가 명치끝이 아려온다. 

  거침없이 흘러가는 가을의 자연스러운 모습 앞에 숙연해지는 이 감성을 공장의 제품처럼 만들어 내는 인간 최후의 몸부림. 사람들은 AI에 살을 입히고 피를 불어넣어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실체를 만들어 낼 거라고 파격적 상상까지 하며 흥분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떤 현실을 보아야 하는지 어지럽다. 그동안 잠자고 있던 인간의 두뇌가 깨어나고 있는 것일까. 유례없는 이 변화 앞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것은 대자연일 것이다. 창작과 창조의 원동력에도 잘 잘못은 분명히 있을 텐데, 과연 편하고 쉬운 영원무궁한 삶의 소재로서 AI는 빛이 날 것인지 묻고 싶다. 찰나라는 단어에 생각은 머문다. 
 
 흐르고 지나가는 시간 앞에 지금 이 순간도 바람은 묵묵히 한 줄의 시를 쓰고 있다. 이 계절 그 문장이 주는 의미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만 한다. 하늘이 내려오고 구름이 그림을 그리는 시간, 인간의 반란인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는 몸부림인지 명확히 하해야만 한다.

 경계는 보이지 않는 상상 속에서 명확하지 않다. 벽이 있는 것만 같아 흔들어 보면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이 세운 건축물에는 경계가 있고 벽이 있지만 시간 속에는 경계가 없다. 가을이라는 계절에도 경계는 없는 것이다. 그저 흐르는 것일 뿐.

  어느 무명의 시인의 노트에서 일부의 해답이 보인다.
 그는 말한다. 현란한 단풍 뒤에 가려진 녹음의 소리를 들어보라고.
  
  AI는 단풍일까 낙엽일까, 아니면 인생의 경계일까. 가을이 깊어져 가니 우문도 깊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