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수필] 졸못회
백운산 계곡은 한여름에도 시원한 물줄기로 더위를 잊게 했다. 우리는 원주 신림 간 가리파 고개 아래 계곡에서 해마다 ‘졸못회’를 열었다. 졸못회가 무엇이냐고. 그 말은 사전에도 없는 단어로 ‘졸업하지 못한 동창회’의 줄임말이다.
1945년 봄 나는 일제 말기에 일본 소학교에 입학을 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 일본어를 배웠으며 일본이름으로 불러야 했고 싫어도 일본말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다가 한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방학 중에 그 역사적인 8.15 해방을 맞았다. 그때는 어려서 무엇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했다.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니 그냥 좋았다.
팔월이 지나고 구월에 다시 우리나라 국민학교 일학년에 입학을 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본 이름을 되찾아 부르게 됐다. 또 하기 싫은 일본 말은 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대로 우리말을 하고 우리글인 한글을 배우니 재미있고 기뻤다.
그 뒤 1950년 6학년에 올라가자마자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여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북한군과 아군이 전진 후퇴를 되풀이 하다가 38도선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1951년 봄 학교에서 수업을 한다고 나오라고 해서 학교엘 나갔다. 학교 건물은 다 불타버리고 교실도 없는 운동장에 모여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 칠판을 걸어놓고 수업을 며칠 받았다. 학생이라야 한 반에 대여섯 명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수업을 며칠 받다 보니 6학년 학생들은 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보러가라고 하여 중학교 입시에 응시했다.
중학교는 4월 1일(1951년)에 개학을 했다. 그야말로 중학교 뺏지를 달고 ‘中’ 자를 붙인 모자를 썼다. 그러나 학교는 없었다. 중학교도 학교 건물이 모두 불에 타 버려 남산(원주)에다 군인 야외 교육장 모양의 계단식 교습장을 만들고 학교 가건물(假建物)이 완성될 때 까지 그곳에서 수업을 받았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다니던 6학년 학생은 60여 명이었는데 졸업장을 받은 학생은 단지 4명뿐이었다. 그중 남학생은 단 한명이었다. 다음 해 한 두 명이 더 진학을 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초등학교 졸업도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1990년대 초 어느 날, 옛날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하던 친구들 몇 명이 모여 졸업을 못한 학생을 포함하여 동창모임을 갖기로 논의되어 수소문하여 연락처를 알아 모임을 갖게 되었다. 40여년 만에 이 특별한 동창회에 참여한 동창들은 30여명에 이르렀다. 학교 다닐 때 보고 처음 보는 친구들도 많았다.
대개의 사람들이 초, 중, 고, 대학 동창회 중에 초등학교 동창회가 가장 기억이 새롭고 뜻 있는 모임이라 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졸업도 하지 못하고 성장해 생활하다가 동창이란 이름으로 모였던 것이다. 이 졸업하지 못한 동창회, “졸못회”, 말 구성도 잘 되지 않는 어색한 동창 모임이다. 다른 지역이나 다른 시대에는 상상이 안 되는 동창회가 아닐까. 접전지역이었던 특정 지역에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간직한 모임이라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게다.
진학을 못한 학생들은 왜 학업을 중단해야 했을까. 전후에 이 지역 주민들의 가정은 대부분 집이 불타버리고 저장해 놓았던 곡식도 다 불타 버렸다. 그러니 당장 입에 풀칠도 못하는데 국민학교인들 보낼 수 있었을까. 당시는 국민학교도 수업료를 내야 했다. 흔히 보릿고개가 힘들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불타버리고 포화에 폐허가 된 지역에서 보릿고개란 이루 말할 수 없는 허기진 이야기였을 게다. 그 어려운 여건을 버티고 살아남은 것만도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초기에 만나서 서로 안부를 물었고 서로 위로하고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래도 그들은 다 나름대로 자기 영역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들, 딸, 며느리, 손자와 함께 단란한 가정에서 살고 있었다.
이름도 어색한 ‘졸 못 동창회’ 이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우리가 사는 특정지역에 한정된 우리 세대 만의 아픈 옹이가 아니었나 싶다.
그나마 한 이 십년 이상 우리는 모임을 이어 왔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그 모임마저 와해되고 말았다. 회장을 하던 친구가 나이 탓으로 회장직을 내놓고 이래저래 인생 졸업한 친구들이 태반을 넘다보니 그 ‘졸못회’ 마져 모이지 못하고 이제 흘러가는 세월만 꼽아보고 있다.
이 땅에 전쟁이란 참화만 없었더라도 우리도 한 세상 멋지게 살았을 터인데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운명이려니 받아 들였지만 더 이상 어떠한 명분으로도 이 땅에서 전쟁이란 몰지각한 행동은 없어야할 것이며 우리세대가 마지막이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전쟁이란 단어는 다시 되 뇌이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약력
최종만 崔鍾萬. 아호 常泉
출생 1938년 3월 22일생
본적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에서 출생
주소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 거주
1963년 11월 3일 육군(병장) 만기제대
1992년 6월 30일 서울지방철도청에서 퇴직
2016. 가온문학 수필 등단
2018, 아주문학회장 역임
2018, 문학과 비평 작가 회원
2024. 경기문학인 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