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수필] 두 번의 약속

2025-03-07     이경자 수필가

 나에겐 오래전에 아버지와 한 약속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던 중 대학 진학을 하고 싶어 몸살이 났다. 늦둥이라 부모님은 이미 환갑을 지나셨고 농촌의 열악한 환경을 잘 알기에 진학하겠다고 말할 수가 없어 망설였다. 
 “아버지, 저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대학에 꼭 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한참 동안 침묵하시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하고 싶으면 해 봐야지. 힘들겠지만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뒷바라지하마. 몸 상하면 안 되니까 몸은 해치지 않게 하거라.” 
  반드시 선생님이 되어 배우지 못한 부모님의 한을 풀어드리고 효도하겠노라 철석같은 약속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취업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취업보다는 한 남자의 아내로 정착하고 싶어졌다. 꿈을 안고 늦게 시작한 공부였지만 꿈을 접을 만큼 사랑은 나를 눈멀게 했다.
  국어 교사 자격증은 내 꿈과 함께 장롱으로 들어갔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삼 남매의 엄마로 살아가면서 취업의 기회는 점점 멀어졌고 아버지와의 약속도 덩달아 멀어졌다. 가끔 가슴 한 귀퉁이에 숨었던 내 꿈들이 꿈틀거렸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빚진 마음에 늘 불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참 뒤 어린이집과 인연이 닿았다. 마침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시립 어린이집이 개원하여 보육교사를 뽑는 공고가 났다. 나와 아름다운 인연이 맺어질 것 같은 예감에 전율을 느꼈다. 어린이집 근무가 결정되자 제일 먼저 아버지가 생각났다. 시골 마을에서 땅까지 팔아가며 대학 공부를 시킨 막내딸이 취업  한 번 하지 않고 결혼하여 섭섭했을 텐데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신 고마운 분이다. 나는 아버지와 약속했던 중학교 선생님은 아니지만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반은 지켰다고 위안하며 최선을 다해 근무하며 지냈다. 

  어느 날인가 남편은 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그만두고 명예퇴직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정규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해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어 했다. 그들이 학력을 인정받아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길 바라는 마음이 명퇴를 부추겼다. 본인이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것과 상관이 있는 것도 같았다.
  정년까지 8년이 남아 있었다. 나는 남편의 선택을 환영하지도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받아들였다.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웠다. 몇 년 전 지인의 남편이 심장 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충격이 꽤 오래갔다.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선택에 반대하지 않은 이유 중 일부이기도 했다. 한 번쯤은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퇴직하고 새로운 학교를 세우는데 마음을 다했다. 나도 주말이면 학교 꾸미는 데 힘을 보탰다. 두 달 동안 발품을 팔아 학교 밖에 학교가 생겼다. 그곳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교로 모든 것이 무료이다. 뜻있는 분들의 후원금과 재능기부로 운영되는 시민의 학교이다. <수원시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비영리민간단체에 등록했다. 수업은 저녁에 이루어진다. 교직 생활을 하며 맺은 인연으로 현직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재능기부로 수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학생 모집을 위해 교차로에 광고를 내고 전단을 만들어 정거장에 붙이기도 했다. 
  막상 학생을 모집하고 보니 처음에 의도했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아이들을 구제하려는 의도와는 다르게 나이 많은 어른 학생이 모이기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혹은 여자라서, 동생들 돌보느라 학업의 시기를 놓친 각각의 사연이 숨어있었다. 시민학교는 졸업생들에게 무료로 배운 뒤에는 사회에 나가 ‘작은 나눔’을 실천하는 시민이 되기를 바라는 철학이 있다. 남편은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책임을 갖고 즐겁게 생활했다. 그의 하루하루가 행복해 보였다.

  나도 정년을 맞이해 6개월이 꿈같이 지날 즈음 남편이 소화가 안 된다며 병원에 다녔다. 의사 선생님이 큰 병원에 가 보라며 소견서를 써 주었다. 검사 결과는 위암. 손을 쓸 수 없었다.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비상 상태였다. 24시간 마스크를 쓰며 병원에서 감옥 같은 생활을 하다 결국 두 달 만에 하늘의 별이 되었다.
  수원시민학교는 남은 선생님들이 꿈꾸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계속 운영되고 있다. 남편은 8년 동안 열정을 갖고 참여했다. 명예퇴직을 하지 않고 정년을 맞이했다면 그가 꿈꾸던 수원시민학교는 없었다. 250여 명의 학력 인정 또한 없었을 것이다. 남편의 선택을 존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은퇴를 하면 나도 시민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봉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남편이 하는 일을 인정하고 응원하는 마음과 오래전 아버지와 약속했던 국어 교사를 학교 밖에서라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막상 남편이 떠나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시민학교에는 갈 수가 없었다. 먹먹한 생활이 2년쯤 되었을 때 국어 교사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다.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민학교에 갔다. 교무실에 <수원시민학교 초대 교장선생님>이라는 문구와 함께 남편의 활짝 웃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터질 듯한 그리움에 목울대가 아파져 왔다. 울컥하는 마음을 달래자 조금씩 평온해졌다. 남편이 잘 왔다며 본인이 못다 한 역할을 해달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국어 선생님이 되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 퇴직 후에 시민학교에서 봉사하겠다는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민학교의 국어 교사로 봉사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시민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수원시민학교의 졸업장이 수여되는 날, 봉사를 시작하고 처음 맞이한 졸업식이다. 70을 바라보는 졸업생이 선생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할 길이 없다며 큰절을 올렸다. 뭉클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건강을 유지하여 시민학교에서 오래도록 재능기부를 하겠다는 의지가 더욱 굳어졌다. 아버지와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며 배움을 갈망하는 분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으로 남겠다고 나 자신과 새롭게 약속했다.

 


이경자 수필가

약력

<수원 문학> <문예 비전> 수필 등단

제10회 경기한국수필 작품상, 제9회 백봉 문학상 대상

한국문인협회, 수원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문학과 비평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