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향기] 복분자에 잇댄 추억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향하고 그림자는 창밖 풍경을 길게 늘이는 시각. 앞집의 대문 기와 위로 석명에 눈이 부신 하얀 박꽃을 보니 왠지 영사기를 돌린 듯 추억의 단편이 지나기에, 냉동실에 얼려 놓은 복분자를 꺼내 주스를 만들며 고마운 분들을 생각한다.
유월 하순의 어느 날, 하룻길의 나들이를 제안하며 기대는 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 하나만 갖고 가자는 지인의 말에 그냥 좋아 따라나선 곳은 충남 예산의 작은 마을이었다. 사방 막힘없는 푸름이 마음에 안정을 준다. 벼보다 한 뼘은 더 웃자란 피가 시선에 먼저 드는 너른 논, 낮은 담장 옆에 줄 서서 손 흔들어 주는 키꺽다리 접시꽃, 장독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배불뚝이 항아리, 흙바닥에 배 깔고 누워 일광욕하는 참외와 수박, 옮기는 걸음 심심하지 않게 효과음 깔아주는 개울물, 어느 하나 아니 좋은 게 없다.
지인의 집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헐렁한 일 바지로 갈아입었다. 잠시 쉬며 차를 타고 온 피로를 풀고 앞마당 울타리 쪽으로 향했다. 둘러친 철망을 따라 키 작은 나무들이 땡볕에 그은 듯한 검붉은 열매들을 다닥다닥 매달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마트에서 구입한 적 있는 복분자다. 낯선 광경이 신기해 조물조물 만져보다 한 줌 훑어 먹으니 입 안이 까매지도록 단물이 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복분자 따기 삼매경이 된다. 자꾸 가시에 찔리는 나만 빼고 모두 능숙하게 잘 익은 열매들을 골라 딴다.
한 시간쯤 지났으려나 배꼽시계가 운다. 일손을 접고 텃밭에서 딴 상추, 쑥갓, 깻잎을 소쿠리에 담아 원두막에 오른다. 가을이면 몇 가마니의 은행을 턴다는 아름드리나무 아래 잘 지어진, 손에 수묵화 그려진 부채 하나 들면 시조 한 수쯤은 쉽게 읊을 것 같은 원두막이다. 그림 같은 풍경 안에 동화되어 밥을 먹으니 “와, 꿀맛이다!”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겸해 마을 곳곳을 걷다가 생각지 못한 경험을 하였다. 시원한 데를 찾아든 구릉의 풀숲인데 여기저기 고사리가 보인다. 쇠어 버린 것도 있고 잘린 데서 순이 올라와 연한 것도 많다. 맨손으로 툭툭 고사리 밑동을 꺾는다. 손톱 밑이 까매져도 재미는 쏠쏠하다. 금방 한 짐이 된다. 집에 돌아가 내 손으로 꺾은 신토불이 고사리로 밥상을 차릴 생각을 하니 뿌듯하다. 지인은 주변에 지천인 먹을거리로 늘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고 하였다. 이제는 부러운 풍속도가 되었지만, 오래 전 우리 집도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어 먹을거리가 풍족하였다. 넓은 장독대엔 어른 허리보다 높고 큰 항아리들과 길고 작은 항아리들이 가득하였고 그 안에는 씨간장을 비롯한 장류와 여러 종류의 장아찌, 간수 뺀 소금, 젓갈들이 있었다. 쥐가 자루를 쏠라닥댄다며 항아리에 잡곡을 넣어두기도 하였고, 불을 때느라 볏단을 쌓아둔 부엌에는 대감 항아리, 술 항아리, 오이지 항아리, 뒤란에 묻은 항아리에는 배추김치, 백김치, 짠지, 동치미, 총각김치들이 담겨 있어 시어머님께서는 시집장가간 자식들이나 친지들이 오면 두 손 가득 싸 주셨다. 앞마당에는 높은 짚가리와 대추나무가 보초를 섰고 창고에는 경운기와 농기구들이 항시 대기 중이던 광경들이 사진처럼 스친다.
광에서 인심이 나는 것인지 성품이 좋아 인심이 후한 것인지 시어머님은 일손을 도와주는 분들이나 찾아오신 손님들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셨다. 제 집 드나들 듯 오는 자식들의 친구들에게도 끼니 거르지 말고 다니라며 아키바레 쌀(추청벼)로 지어 윤이 반지르르한 흰쌀밥을 큰 주발에 고봉으로 퍼 주고 화수분이듯 준비된 김치와 반찬들로 배를 채워주시던 시절이 되살아 온다. 그 후, 집 앞으로 산업도로가 들어서 이사를 하였고 달라진 삶의 모습이 오늘까지 이어지며 논과 밭이 아파트 단지가 된 지금, 그 앞을 지날 때면 아련해지곤 하는데 지인의 시골집에서의 하루가 많은 것을 떠 올리게 한다.
돌아와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황토로 만들었다는 찜질방에 들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때는’으로 시작해 ‘그 사람’으로 이어지는 아줌마들의 수다가 길어진다. 물론 뒷담화도 빠질 수 없지만 ‘우리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니 이해하자’로 귀결될 즈음 하품이 이어지고 “잘 자요”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튿날, 일어난 차림으로 운동 겸 금오산 자락을 걷고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오는 샘물’이 있다는 ‘향천사’를 다녀와 아침 식사를 한 후 예산에서의 일정을 정리하였다. 돌아오는 길, 아산시에 조성된 ‘천년의 숲길’에서 삼림욕을 하고 ‘외암리 민속 마을’에서의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 여정을 끝으로 귀가하였다.
사회생활을 하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지만 싫은 감정이어도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닌, 생각만으로도 마음 따뜻해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과 행복의 애드벌룬을 하늘 높게 띄웠던 날들. 다시 돌아갈 수 없어 회억에 잠기며 미소 지을 뿐이지만 그때 따와 얼려 놓은 복분자로 주스를 만들며, 좋은 경험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할 수 있게 인연의 자락을 쥐어준 감사와 더불어 건강한 여름나기를 기원한다. 바람에 몸을 낮춘 로즈마리가 살 비비며 내뿜는 은은한 향기, 창문을 넘어 든다. 작은 일에 서로의 이름을 불러보는 저녁, 삶의 맛이 달디달다.
약력
2009년 《월간 모던포엠》 시 부문 등단, 2022년 《월간문학》 시조 등단
한국문인협회·국제펜한국본부 회원, 경기문학인협회 이사, 수원문인협회 부회장
대통령 표창, 수원시 문화상, 수원시 여성상, 경기문학인 대상, 홍재문학상 외
시집 『오후의 한 때를 바라보다』, 『물의 독백을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