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의 문학광장] 강아지 꼬리풀꽃, 어느 날의 발견
보통 저수지 가는 골목길에 있는 강아지 카페 「욜로」를 지나가노라면 멀지 않은 시간의 사금파리들이 햇빛처럼 부서져 날아온다. 살짝 아프기기도 하고 아리기도 한 느낌 속엔 그리운 것들이 촘촘하게 박혀서 그림 스케치하듯 선명하게 눈가에 어린다.
애들은 어찌나 강아지를 좋아하는지 강아지가 애들인지 애들이 강아지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쫓아다닌다. 특히 강아지 꼬리를 배배 돌리기도 하고 잡아당기기도 한다.
어느 날인가는 강아지를 보라고 하며 좁은 서울 집에 맡긴 적이 있었는데, 함께 뒹굴고 부벼대는 것이 장난이 아니다. 자면서도 강아지가 어디 있나 더듬어 보고 쪽쪽 뽀뽀까지 하는 것이 다반사다. 어찌나 친하게 지내는지 간지러워 못 볼 정도다.
애들 생각을 하면 저절로 강아지 생각이 따라 온다. 웃고 떠드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다.
강아지 카페를 지날 때면 철모르는 강아지들이 쏜살같이 내달리며 쫓아온다. 울타리에 붙어서 무어라 시끄럽게 짖어대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그 짖는 모습이 반가워하는 건지 낯설어 하는 건지 캉캉컹컹 으르렁거리는 모습만 보고서는 잘 모르겠다. 흔히들 꼬리를 흔들면 좋아서 그런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뾰족하게 나 있는 개들의 이와 발톱으로 할킴을 당하는 순간을 떠 올리면 가까이 가서 머리를 쓰다듬을 수 없다.
가까이 다가가서 어루만지기도 하지만 너무 정 들면 헤어지기가 무섭다는 생각에 아예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다짐을 한다. 「욜로」에는 크고 작은 견공들이 몇 마리 씩 마당에 나와 있다. 꼬리를 흔들 때 보면 강아지들도 자유롭고 싶어 외친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그렇게 자유롭고 싶어 꼬리를 흔들어 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왜 짖느냐는 것이다.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면 될 텐데 요란스럽기 그지없게 나대는 것도 신기하다. 상상은 자유일까.
어쨌든 시끄러운 「욜로」카페의 강아지들 울음소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서둘러 지나가면 낯선 분꽃들이 핀 작은 텃밭이 나온다. 분꽃들을 한참동안 바라보노라면 작은 분꽃 하나하나가 나팔이라는 생각이 든다. 앙징스런 나팔분꽃 앞에서면 어김없이 어린 시절 집앞 텃밭에 피어있던 분꽃들이 사진 찍히듯 떠오른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애잔하게 꽃밭에 들어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곤 강아지들의 짖는 모습이 어느샌가 신기하게도 사라지는 것을 감지한다. 마음이 편안해 짐을 느끼는 것이다. 분꽃들의 꽃밭에는 시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한 언어들이 여러 문장으로 꽃잎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분홍노랑 하양 얼룩이 진 분꽃들에 가까이 가면 따라오던 강아지들 소리가 꽃잎 사이로 숨는 것 같다. 꽃잎의 길엔 풀숲이 헝클어지고, 분꽃사이로 숨은 강아지들이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강아지 꼬리들은 강아지 목소리를 버리고 풀꽃이 되어간다. 다복한 풀잎들이 꼬리를 흔드는 모습은 장관이다. 마치 강아지 카페를 지날 때처럼 꼬리를 흔드는 것이다. 그럴 때는 강아지 꼬리들이 풀꽃이 되어 꼬리를 흔드는 것은 하나도 밉지 않으며 시끄럽지도 않다는 것이다. 생각은 상상 속으로 확장이 되어 강아지들도 영원히 살고 싶어 꽃이 되었나 보라고 생각한다. 믿음 또한 자유니까.
무더운 여름 팔월 그 한 복판에서 된 장마를 견디고 강아지들이 꼬리꽃을 피운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멋진 상상이 되는 즐거움은 점차 커져만 간다.
그 꽃들이 피고 지기를 수백 년, 아니 무한대일진대 어찌 보면 세상에서 제일 작은 핏빛 점 같은 꽃을 피우는 강아지, 그 꼬리들이 잃어버린 강아지 눈망울을 찾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마치 내가 시월이라는 철판요리점 앞 커피 전문점에서, 무료함이란 시어를 하염없이 골라내는 것처럼.
강아지 꼬리가 해질녘에 꼬리를 흔드는 들녘에 가 보라고 무작정 말하고 싶어진다, 강아지 꼬리풀에는 보라색의 작은 꽃들이 붙어 있다. 아니 피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씨앗의 세포분열은 얼마나 멋진 시간의 역사를 알고 있을까. 나가서는 망망한 우주의 눈썹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 핏빛의 씨앗들이 강아지 꼬리에 붙어 생명을 달고 풀꽃을 피워내는 현상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강아지 풀꽃이 다복하게 피어있는 들에 나가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풀꽃을 흔하게 볼 것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아우성진 독백은 이제 그만 하라며 강아지 풀꽃들은 조용히 어미강아지들의 품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재탄생의 윤회적 시간은 무한하다.
이렇듯 발견의 기쁨을 보는 들판에선 언제나 비움의 가르침을 주는 바람 소리가 허허롭게 퍼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