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산책] 어머니의 문장을 읽는 밤

2024-07-18     김순천 시인

이부자리에서 두레박으로 물 긷는 소리가 마실 나와요
열대야를 잠재울 청신한 바람이 솔솔 새어 나와요
내 어머니 고된 하루가 각 잡힌 공간에서 자장가로 흘러요

볕 좋은 낮, 어머니는 이불 빨래를 하셔요
지난밤을 훌훌 벗고 나간 자리에서 뜯어낸 홑청을 애벌 빨아
잿물에 삶고 방망이로 두드려 깨끗이 빨리면 괄게 쑨 풀을 먹여요

바지랑대 세운 빨랫줄에 넓게 펴 말리고
다시 물을 뿜어 네 귀를 맞추고 또 맞춰 가지런히 개켜지면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다듬잇살이 잘 서도록 다듬이질을 해요

손질한 홑청을 볕에 바짝 말려
펄럭펄럭 바람의 파동을 제대로 탈 때면
구겨지지 않게 걷어 티 하나 없게 닦은 방바닥에 얌전히 펴 놓아요

그리고 굵은 바늘에 실 꿰어 골무 낀 손으로 한 땀 한 땀 시치면
하얀 홑청에 촘촘히 새겨지는 어머니의 내간체 문장들
허리 펼 사이 없던 종일이 빼곡히 차 있어요

내 몸은 밤새 그 문장을 읽어요
돌아누우면 잘게 사각대며 아침이 밝을 때까지 내 귀를 떠나지 않아요
곡진한 어머니의 사랑이 하얀 홑청 같은 아침을 열어요.


시평(詩評)

김순천 시인의 시가 날이 갈수록 물이 올라 마음 부푸는 애드벌룬을 타는 느낌이다. ‘어머니의 문장을 읽는 밤’을 어쩌면 그렇게 초연하게 음유할 수 있을까. 어둠이 짙어가는 시간/이부자리에서 마실 나오는 소리, 물 긷는 두레박이라고 했다. 어떤 소리일까, 저마다 음미하는 느낌은 다르지만 사각거리며, 바스락거리며 풀끼 머금은 정성스런 어머니의 소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곤 볕 좋은 낮, 이불 빨래하시던 모습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괄게 쑨 풀을 홑청에 먹인다고도 했다. 그래야 정갈하고 깨끗한 어머니의 마음이 이불에 개켜져 촘촘히 내간체 문장으로 못 다한 이야기를 쏟아 놓을 수 있으니까. 잔잔하면서도 진솔하고, 때로는 분명한 사유를 시 속에 풀어 놓는 여성 중의 여성 김순천 시인. 나는 그런 그녀가 좋다. 일희일비에도 무덤덤하게, 차라리 스스로를 내려놓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느긋하게 살아가는 듯한 그녀의 일상이 신비롭고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김순천 시인은 일상에서도 현대인의 깔끔한 여성의 이미지를 함유하며 고고한 품성으로 주변을 어루만진다. 그러면서 그녀의 시세계에서는 밤새 허리 펼 사이 없던 어머니의 종일을 담담하고도 수려하게 끌어 나가는 한층 승화된 경지로 우리를 불러낸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그녀의 시를 조용히 감상해 보자. 김순천 시인의 시세계를, 곡진하게 살아가시는 우리들의 어머니를 찾아가 보자.

<경기문학인협회장/ 경기산림문학회장 정명희>


김순천 시인

약력

2009년 《월간모던포엠》 시 부문 등단
2022년 《월간문학》 시조 등단

한국문인협회·국제펜한국본부 회원, 경기문학인협회 이사, 수원문인협회 부회장

대통령 표창, 수원시 문화상, 수원시 여성상, 경기문학인 대상, 홍재문학상 외

시집 『오후의 한 때를 바라보다』, 『물의 독백을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