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에 가야 그 자태를 볼 수 있는 바위솜나물과 산양을 찾아갔다. 왕복 일곱 시간의 가파른 산길을 올라 찾아갔다. 2023년 6월 4일에는 바위솜나물의 두툼한 솜털 잎만 보고 오고, 6월 9일에는 열 개의 꽃망울을 보고 돌아왔다.
‘화무십일홍이렷다’
일주일이 6월 16일에 설악산 안산에 다시 갔다. 아마도 오늘은 열 개의 샛노란 꽃송이를 모두 볼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마땅히 있어야 할 열 개의 꽃봉오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꽃봉오리 여덟 개를 끊어가고 두 송이만 남겨 두었다.
‘누구일까? 노랑 꽃봉오리를 잘라간 이는?’
산꾼은 아니다. 꽃쟁이도 분명 아니다. 산양이라면 모를까 이 높은 바위 벼랑을 올라올 사람은 없다. 산봉우리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니 크고 작은 산양 똥 무더기가 눈에 띄었다. 아하, 범인은 천연기념물 제217호 산양이었구나! 어미 산양이 새끼를 데려와 꽃봉오리를 따먹었구나! 그 대신 바위솜나물의 거름이 되라고 똥 무더기 둘을 남겨 두었구나! 아마도 새끼 산양에게는 바위솜나물이 최고의 보양식이었나보다. 알이 굵은 어미 똥과 알이 작은 새끼 똥이 바위솜나물 주변에 소복하다.
그런데 꽃봉오리 두 개를 온전히 남겨 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내년에 씨앗을 하라고 꽃봉오리 둘을 온전히 남겨 둔 것은 아닐까? 산양들이 본능적으로 먹이 식물을 보호한다고 생각하니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발 1천m 바위에 붙어사는 산양과 바위솜나물의 삶은 신비롭다. 눈보라 휘날리는 꽃샘추위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북극곰 털가죽 같은 하얀 외투를 입어 체온의 손실을 막는다.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한겨울 추위를 이겨낸다. 강바닥을 들어내는 가뭄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거미줄 같은 실로 안개 속의 물을 잡아 잎에 모은다. 스펀지로 물을 빨아들여 한여름 땡볕에 필요한 수분을 공급한다. 솜으로 제 몸을 보온하고 선인장처럼 물을 지키는 그들의 지혜에 큰 박수를 보냈다.
설악산 안산에서 바위솜나물을 처음 만난 것은 2016년 6월 14일이었다. 혹여 산양을 만날까 하여 바위봉우리에 올라섰을 때 참 신기한 풀꽃이 눈에 확 들어왔다. 사철나무 잎처럼 둥글고 두툼한 가죽질 잎에 솜털이 보송보송하였다. 가죽질 잎에는 할미꽃처럼 솜털이 보송보송하였다. 그때부터 해마다 설악산 바위솜나물의 생장을 살펴보러 찾아갔다.
2024년 5월 21일 바위솜나물의 꽃봉오리를 다시 보러 갔다. 무려 9년째의 오랜 만남의 시간이었다. 안산 봉우리를 지나 바위솜나물을 찾아가는 산길에 낯선 동물의 사체가 있었다. 두개골의 형태를 보니 지난겨울 폭설에 갇혀 죽었을 산양의 머리뼈였다. 작은 뿔의 형태가 두릅나무의 새순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어쩌면 이 산양이 바위솜나물의 꽃송이를 잘라 먹은 개체이었을 것이다. 바위솜나물이 자생하는 산봉우리에서 불과 3백여 미터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니 말이다.
‘간밤에 꿈자리가 요란하더니... 못 볼 것을 보는 것은 아닐까?’ 어쩐지 불안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저러나 만나기 힘든 산양의 모습이니 머리뼈를 수습하여 배낭에 넣었다. 집에 돌아와 두개골을 가루 비눗물에 담갔다가 칫솔로 묵은 때를 제거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안산 봉우리를 지나 설악산 태극 종주 갈림길에 들어섰다. 바위솜나물이 자생하는 바위봉우리를 향해 부리나케 걸어갔다. 올해는 기필코 열 송이가 달린 바위솜나물의 사진을 담으리라. 그러려면 산양들이 꽃봉오리를 먹기 전에 어떤 조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방법의 하나로 바위솜나물 옆에 막대기를 꽂아 세우고 리본을 달거나 인간의 체취를 남겨야 할 것이다. 인간의 체취라는 것은 사람의 오줌이 제일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마려운 오줌을 애써 참고 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9년 동안 살펴온 바위솜나물의 자취가 없다. 모두 3개체의 바위솜나물이 있었는데 2개체가 사라지고 없었다. 바위솜나물이 있던 자리에는 오이풀만 외로이 자라고 있었다. 누군가 지난 늦가을에 캐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생화 꽃집을 운영하는 사람이거나 자생식물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소행일 것이다. 아이고, 산양의 소견만도 못한 사람들의 소갈딱지라니! 순간 바닷가에 무작정 쌓이는 쓰레기 더미가 연상되었다. 입맛이 쓰다. 이러고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화자찬한단 말인가? 파멸하여 가는 인간 세상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속이 쓰렸다. 그러나 어쩌랴! 남은 한 개체라도 잘 보전해야 하지 않을까? '뽑는 손 나쁜 손'이라고 표지라도 붙여 놓을까?
설악산 안산에서 돌아오는 길이 허전했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감정이었다. 그러다가 사라진 바위솜나물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위솜나물의 자취가 사라진 것이 어쩌면 수명을 다한 자연 현상이라는 생각이었다. 약초꾼이나 야생화를 키우는 사람들이 캐간 것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지만 그들에게는 죽음이라는 시간의 한계가 있다. 사람의 수명은 100년, 은행나무의 수명은 1,000년 등으로 시간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여러해살이풀이라고 무한대의 수명을 가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바위솜나물의 수명은 10년 내외이지 않을까? 그래서 올해는 죽은 뿌리에서 아지를 내지 못한 것이 아닐까? 곤줄박이나 딱새들의 수명이 겨우 3년인 것에 비교하면 바위솜나물의 수명 10년은 매우 긴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이르렀다.
단풍이 물드는 초가을에 설악산 안산에 다시 가야겠다. 바위솜나물의 씨앗이 여무는 현장에 가서 바위솜나물의 씨앗을 채집하여 주변에 파종해야겠다. 그리고 바위솜나물의 꽃송이를 끊어 먹고 죽은 산양의 영면과 하나 남은 바위솜나물의 무탈한 성장을 기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