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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홍선의 평택시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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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홍선의 평택시의회 의장
  • 대담=김인종 편집위원장 / 글=김동초 대기자
  • 승인 2021.03.02 1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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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고 싶은 평택시 되도록 집행부와 상생 펼치겠다”
홍선의 평택시의회 의장이 경인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앞에 포즈를 취했다.
홍선의 평택시의회 의장이 경인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앞에 포즈를 취했다.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에는 무봉산이 있다. 정상이 208m로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정겨운 산이다. 서울타워가 서있는 남산(목멱산·木覓山)이 262m라고 하니 그 높이가 짐작이 갈만하다.

무봉산은 북으로 오산과 접한 평택의 최북단에 위치한 오지중의 오지라고 할 수 있다. ‘깡 촌’이라 할 수 있는 무봉산 기슭에서 1954년 8월 23일 홍선의 평택시의회 의장이 태어났다. 농사를 짓던 집안에서 7남매(4남 3녀) 중 4째이며 차남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홍 의장은 신선한 공기와 정겨운 마을 풍경 속에서 맑고 밝게 자랐다고 한다. 큰 형님 밑으로 5년 씩 차이가 나는 누님이 두 분 계신 관계로 늦둥이 차남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사랑을 어느 누구보다 듬뿍 받고 자랐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장에 가시면 커다란 ‘알사탕’을 ‘근(斤)’으로 사오셔서 벽장에 두고 자신에게만 주셨다는 말도 했다. 당시의 행복한 추억이 엷은 미소로 추억처럼 얼굴에 스치기도 했다. 홍 의장은 부모님의 깊고 두터운 사랑과 애정을 받으며 진위국민학교를 나와 가족의 기대 속에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당시 신림동 달동네에 있던 큰집에서 기거하며 배명중학교와 배명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했다. 그리고 주말마다 고향인 진위에 내려왔던 홍 의장은 마을 어귀의 아카시아향이 너무 좋아 서울로 가기 싫어 그때마다 가슴앓이를 했다고 했다. 이야기 도중 홍 의장의 얼굴에선 청소년기의 순수한 ‘서정성(抒情性)’을 도시의 삭막함 속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맑은 소년의 아픔이 묻어나오는 듯 하기도 했다. 

이 후 고향으로 귀향한 홍 의장은 군에 입대를 했고 제대 후 친구와 함께 현대중공업에 입사, 플랜트사업부에서 6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향과 농사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탓에  농업에 몰두 하며 20대 후반부터 집안의 ‘가장(家長)’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농사만으로 한 집안을 책임진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에 홍 의장은 ‘양돈(養豚)’ ‘양계(養鷄)’등 ‘축산(畜産)’을 함께 병행했지만 연이은 파동으로 심한 ‘부침(浮沈)’을 겪으며 어려움에 처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특히 젖소 ‘목우(牧牛)’는 당시 착유기가 없었던 관계로 상당히 어려웠고 국민대부분이 미군부대에서 배급해주던 우유로 소비량을 대신 할 때였다고 술회했다. 또한 홍 의장은 원예에도 관심이 많았고 특히 시설원예 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좌우명은 ‘정성과 최선 다하며 정도를 가자’
앞으로 농촌은 시설채소 작목에 중점둬야

1978년도에 진위지역은 고자실논(계곡이나 골짜기논들)이 많아 지하수를 파 농업용수로 사용했던 까닭에 채산성이 낮았고 그에 따라 비농가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했다. 이는 시설채소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홍 의장은 2만평을 임대, 자신의 땅 3000평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본격적으로 채소농사를 벌려나갔다고 했다. 거기서 수확하는 채소를 ‘진위’는 물론 인근 용인남사와 오산, 그리고 안산까지 판로를 개척해 보급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또한 홍의장은 보다 효율적이고 가성비 높은 원예 농사를 위해서는 ‘전문지식’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 ‘한경대학’ 원예학과에서 4년간 전문기술을 익히기까지 했다.

이런 열정을 바탕으로 홍 의장은 송탄농협12대 조합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난한 여정을 거친 평택오지의 순수한 청년이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인 진위에서 꿈을 펼쳐나가며 오늘 날 서해안의 희망으로 떠오른 55만 인구 평택시 의장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질곡(桎梏)’서린 여정을 파노라마처럼 회상하는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문. 먼저 55만 평택시의회 의장에 취임하신 소감은?

제8대 후반기 의장으로 취임하고 어느덧 6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의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부담감도 있었지만, 믿고 지지해주신 여러 의원님과 시민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남은 임기 동안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시민들의 입장에서 일하는 의회, 희망을 주고 신뢰 받는 의회,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는 생산적인 의회가 될 수 있도록 의장으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언제나 시민 여러분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시민의 뜻이 시정에 올바르게 반영될 수 있도록 집행부에 대한 감시 견제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겠습니다. 앞으로도 시민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문. 지역사회에서 마을을 위해 일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시다면?

1983년에 마을사람들의 권유로 진위면 동천리 이장에 취임하며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진위면 최초 최연소 이장이 되어 진취적으로 마을을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당시 동천리는 70~80호 가량의 가구가 있는 제법 규모가 큰 부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장은 마을이나 부락의 전방위 적인 살림꾼으로 마을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는 위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농협에서 영농자금 8.000만원을 받아 가구들의 신청서에 따라 자금을 배분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마을에 작목반(경기도에서 1~2위)을 결성했고 중간상인들을 배제한 농민들끼리 조직을 결성해 생산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정부지원금으로 농약을 비롯한 농기구나 농자재 등을 구입하며 농민의 소득증대와 생활안정을 추구하기 시작해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시게 된 동기는?

1983년 마을이장을 보면서 관공서나 금융기관 등에 방문하면 문턱이 너무 높아 일반 주민들이 일상에 큰 불편함을 느꼈으며, 활동적인 사람들은 정당에 밀착해 여러 이권에 개입했고 사익을 챙겼습니다. 또한 농산물을 출하할 때 위탁 상회의 횡포가 심해 농민들의 피땀 어린 농산물이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당시 대농 위탁상과 유통인들의 농간이 무척 심각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해결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던 중 ‘평택시 작목회’ 부회장직을 수행하게 됐는데 작목회원 등 지인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1998년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됐습니다.

문. 한국전문인대상 의정 부문 수상이 갖는 의미와 대한민국소통발전대상을 수상하시게 된 연유는?

지난해 12월 과분하게도 ‘한국전문인대상’과 ‘대한민국소통발전대상’을 수상하게 됐습니다.

‘한국전문인대상’은 한국언론인연대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각 분야의 전문 리더에게, ‘대한민국소통발전대상’은 (사)한국전문기자협회에서 지방의정 발전과 주민 화합을 위해 노력한 지방의원에게 공로를 격려하고 널리기 알리기 위해 수여하는 상입니다. 

제8대 의원으로 재직하면서 평택호관광단지특별위원회, 평택항발전특별위원회, 평택사회적경제연구회, 평택미군기지연구회 등에서 시민들의 피부에 와닿는 지역 발전 시책 발굴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번 수상은 그동안의 활동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게 생각하며, 지역 발전과 주민을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시민 행복과 평택시 발전을 위해 발로 뛰겠습니다.

문. 경기도 첫 번째 지정 관광지인 평택호 관광단지란?

시민들의 여가‧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평택호 관광단지는 1977년 최초 관광지 지정 이후 2009년 관광단지로 확대해 민간투자사업 방식으로 관광단지 조성사업이 추진됐으나, 민간사업자의 사업 포기 등으로 사업 진행이 어려웠습니다. 이후 평택시는 2018년 4월 주민 의견을 수렴해 약 82만8000평에서 약 20만평으로 규모를 축소하여 공공개발 방식으로 추진하는 관광단지 지정 조성계획을 수립했으며, 2020년에는 평택도시공사에 사업을 이관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평택시의회에서는 2019년 3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평택호 관광단지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평택호 관광단지 개발사업에 대한 방향 제시와 평택항 문화관광 클러스터 조성사업, 평택항 2종 항만배후단지 개발사업 등 주변 사업과 연계된 발전 방안 마련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문. 가장 바람직한 집행부와의 관계란?

55만 평택시민의 대의기관인 평택시의회와 집행부인 평택시청은 각자의 역할과 성격은 다르지만 모든 평택시민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집행부와의 바람직한 관계는 집행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라는 의회 기본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협치를 위한 동반자적 관계를 기반으로 시민을 위한 정책 마련을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코로나19 속에 평택시민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은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재앙으로 시민들은 일상을 잃어버리고, 소상공인들은 경영난에 시달리며 모두가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에 평택시의회는 코로나19라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 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문. 의장님의 가정사와 인생의 좌우명이 있으시다면?

저는 지인의 장인어른의 소개로 집사람을 만났으며 오늘까지 ‘동거동락(同居同樂)’을 함께하며 저를 독려했고 위로와 힘을 주고 있습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자녀는 아들만 둘(36세, 35세)이 있습니다. 모두 각자의 몫을 열심히 하고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좌우명은 “모든 일에 정성과 최선을 다하며 ‘정도(正道)’를 가자”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작물을 키웠고, 시의원이 된 후로는 항상 정성을 다해 시민을 섬기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동안 시민과 소통하며, 시민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 대안 마련을 위해 고민하고, 시민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현장 중심의 의정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정성을 다해야 작물도 잘 크고 수확도 많습니다. 앞으로 평택시 발전과 시민 행복을 위해 발로 뛰며, 누구나 살고 싶은 평택시가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의정활동을 펼치겠습니다. 평택시민 여러분 모두 모두 힘내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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