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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신원주 안성시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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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신원주 안성시의회 의장
  • 대담=김인종 편집위원장 / 글=김동초 대기자
  • 승인 2021.03.02 1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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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발전 전환점 될 철도유치에 최선의 노력 다하겠다”
신원주 안성시의회 의장이 경인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앞에 포즈를 취했다.
신원주 안성시의회 의장이 경인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앞에 포즈를 취했다.

안성시는 우리나라 수도권 도시 중 나름대로 정체성이 강한 도시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특히 ‘안성맞춤’의 유래는 경기도에서만 실시했던 대동법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유성룡의 ‘대공수미법’을 개량해 전답의 양에 비례, ‘쌀’로 세금을 매기고 수공업자의 방납을 폐지하면서 조정에서 직접 주문, 구매하는데 탄생했다고 한다. 수공업자들의 좋은 솜씨와 우수한 품질이 합쳐지며 판로가 뚫리고 ‘안성’에서 유기를 통한 수공업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며 번창하기 시작한 곳이다. 또한 우수한 품질의 제품이 맞춘 듯이 생산된다고 해서 ‘안성맞춤’이란 전무후무한 불멸의 명품용어가 탄생한 유서 깊은 도시이기도 하다.

현재 ‘안성’은 경기도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로 1998년 ‘도농복합형태’의 시로 승격한 곳이다. 한우사육이 활발하며 양성면에는 안성테크노벨리 산업단지 조성사업이 추진 중인 곳이다. 인구는 19만 명으로 현재 소폭씩 증가하는 추세며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수도권 배후도시다. 현재 안성시는 코로나19 대 확산사태로 인해 지역경제 침체 위기 속에서도 시와 의회가 힘을 합쳐 농업인을 비롯한 소상공인·중소자영업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며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정책 등을 야심차게 추진 중이다.

또한 안성시미래의 성장 동력을 견인할 3개 프로젝트 철도노선국채사업 역시 활발하게 추진 중이며 안성시는 수도권의 든든한 보루역할은 물론 남부지방과의 첨병을 담당할 교량역할이 기대되는 곳이다. 

이렇게 힘차게 도약을 시작하는 유서 깊은 안성시에서 전·후반기의장을 연임하고 있는 신원주 의장을 만났다.

신의장은 서울사업을 접고 96년 귀향한 이래 이장(4임)을 거쳐 농협이사(재임)와 시의원(재선)에 당선 의장직을 맡고 있다. 사업을 할 당시엔 서울 강동·송파 경기 광주·하남·성남 ‘대한공업사협회2대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신 의장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매순간 매사에 최선을 다해 ‘입지전적(立志傳的)의 대표적인 삶을 살아온 인물로 오늘 날 그가 있기까지의 ’스토리‘같은 인생여정을 허심탄회하게 들어보았다. 

 

코로나19 백신접종 차질없이 추진
좌우명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

문. 의장님의 성장기와 사회생활의 시작은?

저는 1956년에 안성시 일죽면 월정리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농사를 짓던 집안으로 제가 태어나기 전 아버님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동원, 노동의 대가로 수령한 얼마 안 되는 임금으로 구입한 농토에서 농사를 지어왔습니다. 고향인 일죽면에서 ‘일죽국민학교’를 다니다. 2학년 때 가족이 ‘삼죽면’으로 이주함에 따라 삼죽국민학교로 전학, 졸업을 했습니다. 당시 어린마음에도 안성시내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관계로 직업전문학교로 진학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 경제활동을 일찍 시작하셨다고 하는데?

진학한 재건학교는 적성에도 맞지 않고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이른 나이지만 좀 더 활발한 경제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에 자퇴, ‘양돈’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작목반(돼지양돈팀)을 묶어 자연농원 한일농장에서 암컷인 씨돼지 10마리를 구입해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년 반이 지난 후 저희 작목반은 그때서야 ‘무정란돼지사기분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19세였으니 청소년기 끝자락에서 파산을 한 꼴입니다. 너무 어이가 없고 황망했지만 농사로 전환,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산 1000평을 팔아 100만 원을 마련해 경운기를 샀습니다. 당시 우물을 파기위한 굴착기도 구입 이래저래 비용이 많이 들어갔지만 ‘농업용수’ 확보가 여의치 않아 농사 진행이 어려워졌습니다. 돼지구입비용으로 이미 300만 원을 날린 상황에 부모님과의 사이도 원할 치 못한 상태였습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희망차게 시작한 사회생활의 시작치곤 꽤나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문. 이 후 본격적인 경제활동의 전개는?

결국 고향 안성을 떠나 서울 강동구에서 ‘안성공업사’란 이름으로 창호나 보일러 등 건축자재를 취급하는 회사를 운영하시던 형님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10년 후인 28세가 되던 해에는 지인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강동구 암사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회사에서 총괄관리와 현장 출장까지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정신없이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형제인 관계로 실익을 따지지 못했고 빠듯한 월급으로 생활이 정말 힘이 든 시기였습니다. 힘든 생활을 견디며 최선을 다했지만 추운 겨울 어느 날, 그 날도 현장에서 열심히 일을 마치고 회사로 향하다 겨울방한복을 파는 가게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마음에 드는 방한복이 있어 추위도 이길 겸 회사근무복개념으로 구입, 현장출장이 잦았던 근무 형태 상 반드시 필요했던 의복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형님이 월급에서 방한 복 값을 공제한 걸 알게 되어 너무 서운했습니다. 그래서 떠날 때라고 생각이 되어 아무 말 없이 그 날로 회사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문.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고향인 ‘삼죽’으로 내려와서 부모님께 사업자금을 부탁했는데 형님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개의치 않고 제 뜻을 부모님께 소상히 말씀드렸고 저를 믿으신 아버님 친구 분이 당시 900만원 이란 거금을 선뜻 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서울로 상경, 남산 정상으로 올라가 제 사업을 펼칠 장소를 곰곰이 물색했는데 결국 정이 들었던 강동구 성내동에 둥지를 트는 결정을 내리고 ‘안성공업사’ 제2공장이란 간판을 걸고 야심차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최선을 다한 결과 아버님 친구 분한테 빌린 900만원을 이자포함해서 모두 갚고 3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리며 사업을 확장 할 수 있었습니다. 점차 공사규모가 커지다 보니 외형이 느는데 관리비와 인건비 상승으로 실속이 없어 사업을 재정비, 규모를 축소해 건축업으로 전환, 2년 만에 성내동에 3층짜리 집을 직접지어 살 터전을 마련하게 됩니다. 

문. 창호·철구조물 제조공업사에서 건축업을 겸업하는 것으로 전환, 그 후의 행로는?

사업적인 ‘운 때’가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86년에는 전국적으로 건축 붐이 일었고 2년에 집이 한 채씩 늘어날 정도로 사업이 잘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93년경부터 사업이 하향 길에 접어들었고 96년 다시 고향인 삼죽으로 귀향, 소를 키우기 위해 커다란 축사를 짓고 부모님과 함께 살림을 할 생각을 했는데 부모님께서 각각 살림을 하다가 합치기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음식솜씨가 좋았던 아내의 권유로 죽산면에 송어회 전문인 ‘용설리 횟집’을 오픈, 성업리에 운영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 지역정치에 진출하게 된 경위는?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저는 못다 한 학업을 이루고자 2012년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1년 드디어 한경대학 ‘융합레포츠과’를 졸업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2010년 지역 국회의원에게서 도의원의 제의를 받았지만 최 일선 정치일꾼이 적성에 맞는다고 판단해 2010년도에 더불어 민주당에 입당, 2014년도에 시의원(일죽·죽산·삼죽·금광)으로 출마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선을 거쳐 오늘 날 안성시의회 전·후반기 의장직을 역임하게 된 것입니다. 

문. 안성시 의장으로서 포스트코로나에 대한 준비는?

지난해는 코로나19로 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저희 안성시는 2월부터 백신접종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의회와 시가 긴밀히 협력하여 백신접종을 차질 없이 추진하여 코로나19로 침체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시민경제 안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포스트코로나를 대비해 집행부와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입니다. 

문. 21세기 경제와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철도노선’유치에 관해서는?

안성시는 3개의 고속도로와 현재 추진 중인 서울~세종 간 제2경부 고속도로 등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21세기 경제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철도노선이 하나도 없습니다.
안성시의회 의원 모두는 안성발전의 전환점이 될 철도 유치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안성시와 관계된 철도사업은 모두 3가지로 우선 ‘평택~안성~부발’ 국가철도 추진 프로젝트는 총 길이가 53.8㎞이며 1조 6천억 원의 사업비가 들어가는 철도사업입니다. 또한 수도권 내륙선(동탄~안성~진천~청주공항)은 총길이 78.8㎞로 2조 3천억 원의 사업비가 소요되며 ‘경강선’(광주~용인~안성)은 총 길이 57.4㎞, 사업비 2조4천억 원이며 판교~여주 전철을 남측으로 연결하는 연장철도 사업으로 모두 국책사업입니다.  

문. 의장님의 가정사와 좌우명이 있으시다면?

저는 객지에서 제 아내를 만나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수많은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인생의 가장 훌륭한 선택이 집사람을 선택한 것이고 지금은 가장 든든한 인생의 동반자이며 ‘정인(情人)’입니다. 자녀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큰 아들(37세)은 가업인 ‘용설리 횟집’을 운영하고 있고 작은 아들(34세)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자식들을 올바르게 성장시켜 지금은 사회의 일원으로 충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좌우명은 제가 살아온 신념처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입니다. 결과만큼 중요한 게 자신의 굳은 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라도 저는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문. 끝으로 앞날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저는 앞으로 안성시의회 의장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저에게는 저를 믿고 저를 위해 최고의 조력을 아끼지 않는 수만은 동지와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안성의 앞날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찾아 더 높은 곳에서 혼신의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저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주신 안성시민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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