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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교수의 산림경제] 수원 여성 김향화의 3.1독립만세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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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교수의 산림경제] 수원 여성 김향화의 3.1독립만세투쟁
  • 김준혁 한신대학교 교수
  • 승인 2021.02.25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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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한신대학교 교수
김준혁 한신대학교 교수

고종황제의 국장(國葬) 3일 전인 1919년 3월 1일 오후에 수원 화성의 대표적 시설물인 용두각(방화수류정)에 수백 명이 모였다. 경찰이 이곳에 무슨 일로 모였느냐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백성들은 이리 저리 피하는 척 하다가 별안간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일본 경찰들은 두려워 경찰서로 달려가 버렸다. 백성들이 소리 높여 외치는 만세소리를 듣고, 수원의 여기저기서 모여든 군중이 용두각 일대에 수천 명이 되었다.

이날의 독립만세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세계 변혁의 대 흐름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1917년 11월에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식민지 국가를 모두 해방하자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미국이 식민지 국가가 고통받기 때문에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는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식민지를 해방함으로써 그 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실제 의도였다. 어쨋든 미국의 이러한 주장으로 인하여 1차 세계대전 패전국들의 식민지 국가들은 해방이 되었지만, 승전국인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해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0년 8월 나라를 빼앗긴 뒤부터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여 자주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꿈을 꾼 대한인들은 지속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투쟁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결합하여 강력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자 하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와중에 고종황제의 죽음은 조선 민중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기폭제가 되었다.

민족대표들의 치밀한 준비로 마침내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마침내 3월 1일 점심 즈음에 서울 태화관과 파고다 공원의 만세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때와 동시에 전국에서 7개 도시에서 서울과 거의 같은 시간대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중 한곳이 바로 수원이었다.

3월 1일 오후에 용두각에서 있었던 독립만세 투쟁은 그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수원의 만세 투쟁은 지식인과 범부(凡夫)를 가리지 않고 3월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3월 29일 수원군청 앞에서 특별한 만세 투쟁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수원예기조합(水原藝妓組合) 소속 기녀(妓女)들의 만세 투쟁이었다.

그날 수원군청 바로 옆에 있는 자혜의원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던 기녀들이 일제의 국권침탈의 부도덕성을 이야기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수원의 기녀들은 그녀들이 태어나기 100여 년 전에 있었던 정조대왕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에 참여했던 궁중 기녀들을 계승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어느 지역의 기녀들과 달리 조국애가 남달랐다.

당시 기녀들을 독립만세투쟁을 이끈 기녀는 김향화(金香花)였다. 그녀는 1918년에 경성일보사의 사장이었던 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가 만든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에 수록될 정도로 명망있고 아름다운 기녀였다. 만세 투쟁을 하기 전에 그녀들은 1월 21일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체의 가무(歌舞)를 중단하고 근신하였다. 임금님이 독살되어 돌아가셨는데 가무를 즐기고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그녀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3월 27일 고종황제 국장례(國葬禮)의 하나인 ‘성복(成服)’에 참례하기 위해 20명이 소복을 입고, 나무 비녀를 꽂고, 짚신을 신은 채 서울로 올라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그 이틀 뒤인 3월 29일 수원군청에서 독립만세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신분이 천한 기녀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은 단순한 기녀들이 아닌 임진란의 진주 논개와 평양의 계월향을 계승한 의기(義妓)였다.

며칠 뒤면 3.1독립투쟁 102주년이 된다. 우리 수원은 2년전 수원시민들의 열망을 담아 시민들의 추진에 의해 3.1만세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하였다. 대한민국 전체의 모범적인 행사였다. 시민들에 의해 3.1운동 100주년 기념탑이 만들어졌다. 이 기념탑 건립을 위해 수원시민들이 무려 4억원이라는 엄청난 기금을 모금하였다. 필자는 수원시민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무려 3년을 준비하기도 했다. 결국 수원시민들의 노력으로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행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더불어 수원 기녀 김향화와 경기여고를 다니던 구국민단 소속의 이선경 등 독립열사를 찾아내고 이를 현양하는 일을 하였다.

수원은 진정 3.1혁명의 성지(聖地)이다. 가장 낮은 신분의 기녀들까지 나라를 되찾겠다는 독립만세에 참여한 열렬한 백성들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목숨을 걸고 일본과 싸운 선조들의 뜻을 이어 자주의 정신과 실천을 이어가야 한다. 그리고 망언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일본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진심으로 사죄하면 우리는 용서하고 미래를 위해 일본과 함께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사과 없이 거짓만 일삼는다면 우리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3.1독립만세혁명 102주년에 다시 한번 목숨을 걸고 투쟁한 수원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고 또한 새로운 조국과 수원의 미래를 만들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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