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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미화 안산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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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미화 안산문화재단 대표이사
  • 대담=김현채 경기북부취재본부장 / 글=김동초 대기자
  • 승인 2020.11.01 1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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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우먼 출신답게 안산문화재단서 흥겹게 일하고, 마치고 싶어"

-시사 프로그램에 개그맨 섭외 처음
-농업법인 '순악질' 문화놀이터 제공
-동양철학과 언론정보 박사과정 마쳐
김미화 안산문화재단 대표이사가 경인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강영수 기자]
김미화 안산문화재단 대표이사가 경인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강영수 기자]

지난 10월 29일 오후 1시, 한 낮의 태양은 아직은 여름 끝자락의 열기를 머금고 있을 때이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 잘 놀아 볼까요.!” 안산문화재단 대표이사실에서 만난 김미화 대표의 최초 ‘일성(一聲)’으로 인터뷰 초입에 취재진에게 던진 말이다. 이날 참석한 매체는 ‘경인경제’는 물론 ‘서울뉴스통신’과 ‘글로벌이코노믹紙’에서도 나와 합동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됐다.

먼저 안산문화재단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옛 이름은 ‘안산문화예술의 전당’이었다. 2004년 6월 17일 준공을 했으며, ‘여르미오’ 축제와 ‘하모니’ 축제를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문화예술의전당의 각 부분에 대한 치밀한 점검을 거쳐 그해 10월 2일 ‘안산시민의 날’을 맞아 개관을 했다. 당시만 해도 전국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최첨단의 시설은 세계적인 대작도 능히 처리 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춘 문화의 명소였다.

그리고 드디어 2013년 1월 (재)안산문화재단으로 재출범을 하기에 이르렀다. 안산문화재단은 사회간접자본과 기간산업에 대한 투자, 정부업무의 위탁 등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공직유관단체로 보면 된다.

2018년에는 재단홈페이지를 통합개편 했고 2019년에는 김홍도·강세황 한국화 진본을 전시하기도 하며 안산단원미술제 국제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리고 예술경영대상 우수전문법인으로 선정(문체부)되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2020년 8월 문화재단 제5대 대표이사에 최초로 개그우먼 출신인 김미화씨를 선임하며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사회전반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안산은 한 시대를 풍미한 유명한 화가, 단원 김홍도의 고장으로 옛 부터 문화와 예술이 융성했던 곳이다. 현재는 세계적인 ‘안산국제거리극축제’를 비롯해 대부도란 천혜의 관광문화를 간직한 섬이 연결되어 있으며 각처에 잘 정돈된 녹지공원이 있고 조각상을 비롯한 예술품들이 즐비해 시민들의 문화향유와 수준이 매우 높은 도시이다. 이런 문화도시 메카인 안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취임한 김미화씨를 만나 1시간 반 정도의 놀이마당 같은 인터뷰를 즐겼다.


Q. 문화예술계 최초, 개그우먼출신으로 문화재단 대표이사에 취임하셨는데 소감은?

저는 여러분들이 익히 아시다 시피 알려진 개그우먼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남을 웃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보다 즐거움도 많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8월 10여 명의 경쟁자들과 함께 면접을 진행해 5명안에 들었고 최종 2차 면접까지 거쳐 대표이사에 취임했습니다.

일반인들이 살짝 의아해 할지는 모르지만 저는 개그를 비롯해 MBC에서 8년 반, CBS에서 1년 반, 도합 10년을 하루 2시간 씩 시사프로그램도 진행하며 다방면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각계 각층의 전문가를 포함한 분야마다 저명한 인사들과 대담을 나누며 식견을 쌓은 것이 오늘 날 안산문화재단의 대표이사로 취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8월에 취임, 이제 두 달이 안됐지만 안산이란 도시의 높은 문화수준과 문화인프라에 새삼 놀라고 있습니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님의 어진을 그렸을 정도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가 태어난 곳이며 심훈의 상록수가 탄생했고 성호 이익선생의 사당이 있고 여성문학 운동가 채용신이 태어난 곳입니다.

문화와 예술 방면의 뛰어난 인재들이 즐비한 곳이기에 문화적 수준 또한 매우 높은 도시로 발 돋음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훌륭한 도시의 문화재단 제5대 대표이사로 취임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2년 동안 시민들과 잘 놀다가고 싶습니다.

역시 인터뷰를 하시는 기자여러분들도 저와 인터뷰시간을 재미있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Q.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 아니 해외 동포는 물론 북녘 동포들에게 까지 큰 웃음과 희망을 주셨던 김미화씨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가 궁금합니다.

저희 집안은 웃음기가 별로 없었던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조금은 타이트하고 어찌 보면 생존의 무게에 힘들어 했던 환경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64년에 용인시 상갈동에서 2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제 밑에 여동생은 저보다 7살이 어리니 거의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독자였습니다. 어릴 적 아버님이 건강이 안 좋으셨던 관계로 치료차 서울로 올라왔지만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9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2살 된 어린 제동생과 저를 부양해야 하는 어머님이 많은 고생을 하셨던 기억이 쓸쓸하게 앙금처럼 남아있습니다.

어릴 적 주된 기억이라면 음식점(순대·족발·해장국 등)을 하는 어머님을 도와 음식재료를 다듬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족발에 있는 털들을 다듬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암튼 최선을 다해 어머님을 돕던 기억이 아프게 새롭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개그우먼에 대한 꿈은 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19살 되던 해 수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무궁화관광’이라는 여행사에 경리사원으로 면접을 보기도하며 개그맨 시험공채에도 도전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Q. 본격적으로 개그맨 생활을 하시게 된 과정과 진행은?

1983년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 19세 때인 제2회 KBS개그콘테스트에서 ‘사부와 석순이’란 코너로 은상을 수상했고 그로인해 공채2기로 개그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코미디계에서 절정을 이룬 시기는 국악명창 김영희씨가 추임새를 넣고 김한국씨와 호흡을 맞춰 검정테이프로 일자눈썹을 붙이고 ‘쓰리랑 부부’코너를 할 때입니다. 지금도 유명화백님이 그려주신 순악질 여사캐릭터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화려한 전성기를 거쳐 드디어 1990년에는 여성 최초로 KBS 코미디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Q. 개그우먼으로서 최고의 정점까지 오르며 국민들의 사랑을 극진하게 받으셨는데 위기극복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저는 ‘꿈’을 가지고 목표를 정해 그것을 이루면 행복의 절정에 도달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인기가 오르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 생각하시는 데 매 순간마다 항상 고비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마다 ‘마인드콘트롤‘로 위기를 다스리고 헤쳐 나갔습니다.

그래서 시련기에도 평상심을 유지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제가 낙천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라서 인지 별 위기가 없는 인생을 살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쉽게 말해 “이 ‘문(門)’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릴 것”이라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매사를 대했습니다. 저는 연기를 잘하는 연기자가 되고 싶었고 남들에게 연기를 잘하는 연기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연극이나 프로그램에서 주연을 맡았고 메인 역할을 했습니다.

연기는 물론 프로그램 진행부터 연출까지 나름의 여러 과정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맡아 진행을 했습니다. 저는 어떤 역할이든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소화했고 최상의 몰입도로 역할에 임했습니다.

과정을 즐기며 “여기서 놀다 가겠다”란 마인드로 즐겁게 역할에 충실했고 결과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는 코메디안들이 결혼이나 연애 등 스캔들에 휘말리면 연예인 생활을 접어야만 하던 시기로 연기활동에 정말 제약이 많았던 시절입니다.

김미화 안산문화재단 대표이사는
김미화 안산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안산은 문화와 예술 방면의 뛰어난 인재가 많고, 문화적 수준 또한 매우 높은 도시"라고 강조했다. [사진=강영수 기자]

Q. 우리나라 최고 방송인 MBC와 CBS에서 그 어려운 시사프램을 능숙하게 진행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개그우면으로 상종가를 치며 완숙기에 접어들었을 때 MBC에서 시사프로그램 방송섭외가 들어왔습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다방면의 분야를 다루는 시사성이 강한 종합프로그램으로서 개그맨 출신에게 섭외가 들어온 건 그때가 처음입니다.

그래서 2003년 10월 20일부터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이라는 타이틀로 방송을 개시해, 2011년 4월 22일까지 8년 반을 하루에 2시간(오전 6시~8시)씩 출근 시간대에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며 장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방송에 출연하는 게스트들과의 대담과 진행을 위해 항상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준비했고 철저히 공부해 그들을 리드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게스트들의 대본은 이미 짜여져 있었지만 저는 좀 더 연구한 자료로 대본 밖의 질문을 해 방송의 재미와 질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화근이 되어 권력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후임자에게 넘기고 방송프로그램을 하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CBS로부터 방송제의가 들어와 “김미화의 여러분”이란 코너로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1년 반 동안 방송을 해 10년 방송경력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도 않고 잘 놀고 내려온 것 같아 미련도 후회도 없습니다.
 

Q. 방송프로그램 진행 하차 후 하셨던 일은?

2012년 말 쯤 방송에서 하차를 한 후 고향인 용인으로 내려가 1200평 정도 되는 대지에서 우렁이를 이용한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농업법인 ‘순악질’을 설립해 농부들을 도우며 그들에게 문화놀이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의 저에게 정말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김미화 마을’이라는 카페겸 야외공연장을 운영하고 있고 실내공연장과 펜션 등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날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성균관대에서 ‘현대예술철학’을 수료했고 지금은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또한 저는 2001년, 성균관대에서 사회복지로 학부를 마쳤고 언론정보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방송쪽으로는 2000년 MBC, KBS, SBS 코미디언협회를 결성했고 초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Q. 가정사와 김미화 대표이사님의 좌우명이 있으시다면?

저는 재혼을 해 아무리 많은 대화를 나누어도 즐거운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 4명(아들1 딸3)이 있습니다.

제 아이 둘과 남편 아이 둘도 함께 잘 어울리며 서로를 존중해 참으로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좌우명은 “먼저 죽지말자”입니다. 남겨진 이의 슬픔과 고통을 생각하면 먼저 죽는 것은 정말 못할 일입니다. 저는 남들이 흔히 생각하지 않는 ‘묘비명’도 생각해 놓았답니다.

마지막까지 무대에 서고 싶은 절실하고 진실한 심정을 담아 “웃기고 자빠졌다”로 하고 싶습니다. 저는 ‘뼈’속까지 개그우먼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맡고 있는 ‘안산문화재단대표이사’로서 코로나19로 삶에 지친 안산시민들에게 비 대면으로 즐길 수 있는 문화컨텐츠를 바탕으로 한 동영상과 AR 등을 제작해 힘과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끝으로 제가 신명나게 이곳 ‘안산문화재단’에서 흥겹게 일하고 마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진심과 열정으로 신명을 다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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