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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북학(北學)과 한국 경제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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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북학(北學)과 한국 경제의 발전
  • 경인경제 기자
  • 승인 2020.03.12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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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한신대학교 교수

조선후기 경제적 어려움은 기후 이변이 큰 요인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급격히 나타난 기후 이변은 가뭄과 홍수를 지속적으로 몰고 왔다. 요즘으로 치자면 ‘엘니뇨’, ‘라니냐’ 현상이 나타났고, 이와 같은 기후 이변은 농업이 국가 경제기반의 전부였던 조선을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게 하였다.
특히 기후 이변은 전염병을 유발시켰다. 오늘날 장티프스인 괴질이 등장하고 역병 중의 역병인 콜레라도 등장했다. 조선땅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콜레라가 유럽을 거쳐 중국에 이르렀고 마침내 조선으로 건너와 엄청난 백성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가뭄과 홍수 그리고 전염병이 나타난 조선은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자식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나무에 묶어 놓고 도망간 부모들이 즐비하게 있는가 하면,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재산가의 집에 노비가 되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비극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시대를 해결하기 위해 영조와 정조시대 개혁이 시작되었다. 영조는 탕평정책으로 정치적 안정을 추진하고, 이를 바탕으로 농업개혁을 추진하였다. 정조대에 들어와 탕평정책은 더욱 확대되었고 각종 법률의 폐단을 없애는 정책을 만들었다. 농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그간 사용하지 않았던 저수(儲水) 농업을 추진하였다. 저수지를 만들고 저수지에서 논으로 내려가는 물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직접 씨앗을 뿌려 벼를 키우는 직파법에서 못자리를 만들어 모를 키우는 이앙법과 같은 새로운 영농방식을 적극 도입하였다. 그러나 경제 활성화가 어찌 농업의 발전만으로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정조는 국가 전반에 대한 발전을 위하여 조정의 전 관료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였다. 국왕인 자신에 대한 어떠한 비방도 벌을 주지 않을 터이니 국가 개혁을 위해서는 모든지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수많은 관료들이 좋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산더미같은 개혁 방안중에서 가장 파격적인 것은 바로 박제가의 제안이었다.
박제가는 정조 즉위 때부터 북경(北京)으로 길을 나섰다. 북경으로 가서 청나라가 오랑캐가 아닌 문화의 수준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조정의 관료나 백성들이 무척이나 실용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이러한 실용성의 기반이 만주족 특유의 기질과 함께 서양 선교사들의 과학 기술과 경제정책을 적극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제가는 정조에게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경제 활성화를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른 바 ‘병오소회(丙午所懷)’가 그것이다. 1786년(정조 10)인 병오년에 자신의 가슴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이야기 했다는 박제가의 ‘병오소회’는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정책 제안이었다. 서양의 과학기숳을 받아 들이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바로 서양 선교사들을 초청하자는 것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갖고 있는 건축, 토목, 천문, 수학, 물리, 의료, 무역 등의 모든 기술과 경험들이 농업만을 중요시하던 조선의 경제를 전면적으로 혁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위험이 담보되어 있다. 그것은 ‘사학(邪學)’으로 인정되고 있는 천주교를 조선 사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서양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측근들인 정약용, 이가환 등이 천주학에 연계되어 있다고 해서 노론 관료들이 정조를 공격하기도 하는 정치적 상황속에서 박제가의 파격적인 제안은 정조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박제가는 국가 개혁을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와 이념 등을 파격적으로 극복하고 이를 돌파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검은색 쥐든 흰색 쥐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현대 중국의 지도자인 등소평의 의견과도 같은 것이다.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의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박제가의 제안은 오늘 이 시점에서도 무척이나 유용하다. 아니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 경제의 위기 극복은 남북 경제교류가 답일 수 있다. 개성공단을 다시 부활시키고 철도를 개통시켜 북한의 천연자원을 활용해야 한다. 이렇게 남과 북이 경제교류를 하게 되면 전 세계의 자본가들이 안정된 상태에서 대한민국으로 투자를 하게 된다. 돈이 돌고 자원도 돌게 된다. 관광 산업도 커져나가도 청년들의 취업도 당연히 활성화된다. ‘오포 세대’, ‘칠포 세대’란 부정적 단어들도 사라질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좋아지게 할 남북교류가 도대체 왜 안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념(理念) 때문이다. 아직도 철지난 반공이데올로기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게 위해 남북교류를 막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는 것이다.
조선후기 박제가의 파격적인 제안을 적극 검토하고 이를 수용하고자 했던 정조처럼 우리도 닌보와 보수, 아닌 반공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적극적인 남북 교류를 통해 한국 경제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한신대학교 교수, 한국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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